그 해 9월, 초가을 햇살은 찐득한 열기를 뿜으며 사정 없이 팔뚝을 휘어감았다. 마석 모란공원, 혜숙이 잠들 직사각형 묘터는 이미 반듯하게 파여 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갓 오십. 남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편바라기가, 엄마 손길이 한없이 필요한 아픈 맏딸아이, 입시준비생인 두 아들. 명문대 욕심이 누구보다 많은 욕심쟁이 엄마 혜숙이 새끼들 못 잊어 눈이나 제대로 감았을까. 2004년, 민청련 최민화 부의장의 아내 박혜숙은 그렇게 떠났다. 친자매처럼 정을 나누던 민청련 여자들 중 1번 타자로.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맺어진 인연박혜숙은 강원도 삼척 태생이다. 서울로 올라와 수송초등학교, 경기여중고를 나와 1972년 이화여대 약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밖에 모르던 범생이 박혜숙이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이대 동아리 '파워' 회장을 맡고부터였다. 격랑의 70년대.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사건,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선포가 이어졌다. 영구집권을 꿈꾸는 박정희 독재정권은 농민이든, 노동자든, 학생이든 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철저하게 압살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잇달아 선포됐다. 반독재투쟁전선 열기로 전국 대학가가 들끓었다. 이대 운동권 박혜숙도 그 중심에 있었다. 전국 주요 대학을 아우른 반유신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결성이 무르익던 3월 말에서 4월 초,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기밀을 탐지한 중앙정보부한테 조직은 박살나기 시작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고 반국가단체 민청학련 연루자로 이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중앙정보부 지하실, 서빙고 보안사대공분실로 연행돼 무차별 고문으로 뭉개졌다.
민청학련 이대 책 박혜숙도 남산 중정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대에서 연행자로는 혜숙이 유일했다. 여차했다간 뼈도 못 추릴 공포의 지하 조사실, 고문 도구 앞에 혜숙은 무너졌다. 배후를 대라는 저승사자 앞에 얼굴도 못 본 최민화를 찍었다. 최민화는 KSCF(전국기독학생총연맹)의 서울 연합회장. 정 버틸 수 없을 땐 신원이 공개된 단체 대표를 배후로 '부는' 게 운동권의 매뉴얼이었다.
연대 최민화도 중정 지하 조사실로 끌려갔다. 가자마자 통닭구이, 물고문을 자행하더니 이대 배후가 최민화라는 걸 박혜숙이 실토했으니 뺄 생각 말고 이실직고하라고 물속에 머리통을 처박았다.
이대 박혜숙이라니, 모르는 사람이었다. 절대 아니라고 부인을 했으나 돌아오는 건 더 가혹한 고문뿐이었다. 최민화가 아무리 고문을 해도 아니라고 부인하자 박혜숙을 끌고 와 대질심문을 하겠다고 했다. 여기에서 최민화는 무너졌다. 눈앞에서 여학생이 당하는 꼴을 보는 건 차마 못 할 짓이었다. 두말없이 자기가 배후라고 자백했다. 그리고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혜숙은 100일 만에 풀려났다. 이대 김옥길 총장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된 동생 김동길 교수와 이대에서 유일하게 연행된 제자 박혜숙의 석방을 위해 매일 아침 중앙정보부 입구에서 일인시위를 한 덕분이었다.
최민화를 향한 일편단심얼굴도 못 본 최민화를 배후로 불었으니. 최민화가 얼마나 당했을까는 안 봐도 비디오다. 혜숙은 그때부터 최민화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오산 보건소 간호사였던 최민화 어머니는 학생운동을 하는 아들을 탐탁해하지 않아 면회도 오지 않으셨으니, 혼자 아들 뒷바라지를 하시는 아버지에겐 구세주가 따로 없었을 게다.
함흥 초대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난 최민화 어머니는 캐나다 선교사가 원산에 세운 영생여고보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함남 도립병원 간호학과을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월남했다. 어머니는 일제 시대에 오빠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진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본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독립운동이건 민주화운동이건 가는 길은 말로가 뻔하다. 막지는 못할지언정 뒷바라지는 언감생심이었다.
혜숙은 수업이 끝나면 하루도 빼지 않고 교도소로 달려갔다. 책과 영치물을 차입한 뒤 변호사 만나랴 인권단체, 종교단체 쫒아다니랴 재판정 나가랴 쉴 틈이 없었다. 그뿐인가. 최민화 부모님 계신 오산을 오르내리며 소식을 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신적인 옥바라지는 대학가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들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졸업도 안 한 재학생이 결혼한 부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니. 중앙정보부가 맺어준 평생 인연 박혜숙과 최민화. 이때부터 혜숙에게는 최민화가 인생의 전부였다.
최민화를 마음에 둔 혜숙은 복학을 했으나 학생운동에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최민화와의 미래를 생각해 봤을 때 감옥이 일상인 반독재투쟁은 둘이 다 할 수 없다. 열심히 돈 벌어 민화 형 뒷바라지에만 충실하겠다 결심하고 최민화에게 접근했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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