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사람... 이런 군인 또 없습니다

전두환의 12·12 쿠데타는 표면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에 대한 하극상이다. 하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대 흐름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 쿠데타는 부마항쟁과 박정희 피살 이후 급진전되던 민주화 일정을 훼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반역사적 사건인 것은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에 대한 하극상이어서가 아니라 세상과 국민에 대한 거역이어서다. 우리 국민들이 12·12에 분노하는 것은 국가기관 내부의 서열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이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12·12는 민주주의 혁명을 가로막는 반혁명 같은 것이었다. 그런 성격을 갖는 12·12를 온몸으로 막아선 군인이 수도경비사령관인 장태완 장군(1931~2010)이다. 장태완이 막아선 것이 단순한 하극상이 아니라 반혁명이었다면,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크게 달라질 필요가 있다.

반란군 경악하게 만든 장태완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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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48세였던 전두환은 쿠데타에 걸림돌이 될 게 뻔한 장태완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자신이 사는 서울 연희동의 고급요정에 초대해 놓고 거사를 개시했다. 하지만 동갑내기 장태완은 정승화가 반군에 붙들려 간 지 8분 뒤인 12월 12일 저녁 7시 35분에 요정을 떠나 사령부로 향하면서 정승화 구출 지시를 내렸다.

그런 뒤, 서울 남산 쪽인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에 도착한 8시부터 반군 진압을 본격화했다. 전두환의 계략에 휘말려 수렁에 빠질 뻔했던 장태완은 전두환을 응징하는 쪽으로 달려갔다. 장태완이 정변 진압에 나서는 것은 전두환의 시나리오에 없는 일이었다. 생각지 못한 인물의 전면 등장으로 인해 그날 밤에 반군은 여러 번 경악을 해야 했다.

10시 반경, 서대문에서 시청을 향하는 전차들이 땅을 밟으며 굴러가는 소리가 시청에서 약 1킬로미터인 경복궁의 반군 지휘부에까지 들렸다. 1993년 6월 15일 자 <동아일보> 기사 '청와대 근위부대' 제13편은 "쿠데타 지휘부는 이 전차 구르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라고 말한다. "등골이 오싹"해진 노태우(47)는 "장태완이가 정말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는구나", "우리는 모두 불법 하극상세력으로 체포되고 마는구나"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에 따르면, 장태완은 11시가 조금 넘은 뒤 수경사 장교 60여 명을 모아놓고 전두환 충복인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의 장태완은 반군들의 저승사자였다.

장태완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돕는 편에 섰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유신독재체제가 선포(1972.10.17.)되기 전인 1971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1973년 4월부터 1975년 7월까지 수경사 참모장을 지냈다.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군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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