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비평가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연산군이 허황되고 음란했지만 문학을 좋아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의 어느 봄날 연산군은 자작시 두 수를 내려주며 신하에게 운자(韻字)에 맞춰 화답하라는 명을 내렸다. 두 번째 수에서 읊은 봄날의 정경은 다음과 같다.
시인으로서 연산군은 꽃과 나비 같은 자연 경물을 즐겨 읊었다. 시 문면(文面)에선 흐드러지게 핀 윤기 넘치는 꽃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없이 꽃떨기에 잠든 나비를 보호하려는 다정한 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첫 번째 수에선 연산군의 또 다른 면모가 노출되어 대비된다. 신하들에게 자신의 은혜에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강요하고 명령을 어긴다면 우레 같은 노여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겁박한 것이다.
연산군은 즉위한 뒤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죽은 억울한 사연을 알고 격분하여 온갖 패륜적 악행을 저질렀다. 선왕의 후궁들과 할머니 인수대비를 죽이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수백 명의 지식인을 처형했다. 형벌의 방법도 잔혹해서 사람을 죽인 뒤 뼈를 부숴 바람에 날려버리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관을 열어 시신을 욕보이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 직전인 같은 해 8월 23일의 잔치에서 자신의 몰락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인생은 풀잎의 이슬과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다네(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라고 읊었다. 그러곤 장녹수와 전비 등 자신의 총비(寵妃)들이 변고가 생겼을 때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했다.
영화 ‘다운폴’에서 패전 위기에 몰린 히틀러(오른쪽)는 자살 직전 비서와 요리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피터팬픽쳐스 제공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절대 권력자의 몰락을 조명한 베른트 아이힝거 감독의 ‘다운폴’(2004년)의 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영화는 히틀러의 몰락 과정과 최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히틀러는 자살 직전 비서와 요리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악인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연산군의 폭정은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에 대한 증오로부터 기인했다. 증오가 개인은 물론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증오’(1995년)가 잘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50층짜리 건물에서 추락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어? 한 층 한 층 떨어질수록, 그는 마음을 추스르려고 이렇게 말하지.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하지만 중요한 건 추락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착륙하느냐는 거지”라는 독백이 나오는데, 마지막 장면에선 이야기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사회로 바뀐다. 영화는 삐뚤어진 증오가 개인을 넘어 사회를 어떻게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한 편의 우화처럼 설명한다.
몰락할 무렵 연산군의 한시를 읽으며 절대 권력자의 삐뚤어진 증오와 광폭한 만행이 국가와 개인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생각해 본다.
요즘 시국에 시의적절한 좋은 글입니다. 절대권력자의 증오와 망상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그 권력자를 쫓아 증오와 망상에 빠진 무리들이 자신까지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연산군과 히틀러는 자기 측근들의 안위라도 걱정했건만 이 나라의 절대권력자는 어찌 책임을 아랫사람들한테만 돌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저리도 뻔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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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6 13:40:01
요즘 시국에 시의적절한 좋은 글입니다. 절대권력자의 증오와 망상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그 권력자를 쫓아 증오와 망상에 빠진 무리들이 자신까지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연산군과 히틀러는 자기 측근들의 안위라도 걱정했건만 이 나라의 절대권력자는 어찌 책임을 아랫사람들한테만 돌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저리도 뻔뻔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