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곤은 1985년 7월 민청련에 대한 탄압으로 구속되어 꼬박 2년간 징역을 살고 6월항쟁의 성과로 87년 7월 석방됐다. 거듭되는 감옥살이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을 본인이 느끼기 시작했지만 6월항쟁 이후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으므로 석방되자마자 운동 일선에 다시 뛰어들었다.
의견 다르나 조직 결정에 승복, 김병곤의 진정한 승리김근태를 비롯해 전 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어 지하로 들어갔던 민청련도 6월항쟁으로 김근태를 제외한 간부들이 거의 석방돼 공개운동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8월에 열린 총회에서 민청련은 김희택을 의장으로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 권형택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당시 김희택은 김병곤을 의장으로 추천하고 수락할 것을 종용했지만 김병곤은 끝까지 고사하고, 선배인 김희택이 의장을 맡도록 밀었다.
당시 김병곤이 의장을 고사한 것은 선배에게 양보하는 겸양의 뜻이 컸지만, 한편으로 6월항쟁으로 열린 공간에서 민중운동연합으로서 민통련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민통련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병곤은 자신의 뜻대로 민청련 부의장으로서 민통련 정책실 차장을 겸하게 되었다. 정책실 차장은 정책실장 장기표가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책실을 총괄하는 책임자 역할이었다. 그는 민통련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통해 민중운동이 중심이 되는 통일전선 건설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면서 경기남부 민통련 건설 등 실제적인 조직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8월 말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2월 대선 일정이 구체화되면서 정국은 대통령 선거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다. 김병곤의 생각은 6월항쟁 이후 열린 공간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운동의 성장과 그를 바탕으로 한 민중운동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고, 대통령 후보 문제는 2차적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선거 국면에서 대중들의 관심은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인가에 쏠릴 수밖에 없었고, 국민운동본부, 민통련, 민청련 등 재야운동 단체는 이 대통령 후보 문제로 엄청난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된다. 김병곤은 민중운동세력의 성장이 아직 미약한 상태에서 독자 후보를 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았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김대중-김영삼 양 후보의 '후보 단일화'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러던 중 김병곤이 속한 민청련과 민통련이 많은 토론과 조직적 진통 끝에 김대중 '비판적 지지'를 결정하자 김병곤은 그 결정을 지지하고, 수호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끝까지 옹호하고 관철하려고 했다. 그의 건강에 결정적 타격이 된 구로구청 투쟁과 6번째 징역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김병곤의 조직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김근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되는 것은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가 아니고 병곤이의 바로 이 점, 자신의 의견과는 달리 내려진 공적 결정인 경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영광입니다>, 거름, 1992
그러나 민청련과 민통련의 비판적 지지 결정 이후에 전개된 상황은 김병곤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애초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민중운동에 중심을 두고 민중 역량 강화를 위해 채택된 전술적 방침으로 천명되었으나, 선거국면이 진행되면서 비판적 지지 진영은 점차 '4자 필승론' 같은 선거혁명론의 환상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객관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선거 감시만 잘하면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 유포되었다. 게다가 재야운동권 다수가 비판적 지지를 했는데도 양김의 팽팽한 균형은 깨지지 않았다.
이런 위기감이 김병곤으로 하여금 10월 7일 양김 초청 고려대 집회를 추진하게 한다. 이 집회는 국민운동본부 산하 청년학생공동위원회가 주최하여 전두환 퇴진과 거국중립내각 수립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이 집회는 한편으로 양김 단일화가 협상이나 중재로 이루어지기 힘든 상태에서 투쟁 속에서 대중적 압력으로 양김 단일화를 이루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김대중과 함께 단상에 서는 것을 꺼리는 김영삼을 어떻게 참석시킬 것인가였다. 이때 김병곤이 김영삼 쪽 교섭을 맡고 나섰다. 그는 김영삼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여 일부 참모들이 강력히 반대했는데도 김영삼을 설득하여 집회 참석 약속을 받아내고 집회를 성사시켰다.
10월 7일 고대 집회는 10만 관중이 참석하여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특히 그중 다수가 김대중을 지지하는 군중들로서 김대중의 연설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김대중 측에서 '양김 대중집회에서 김대중 지지가 확인됐으므로 분당한다'고 하는 이른바 '분당 선언'을 함으로써 집행부의 취지가 무색하게 되었다. 결국 고려대 집회는 김대중의 평민당 분당의 길을 열어주었을 뿐 김병곤이 주장했던 '투쟁 속의 양김 단일화'라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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