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원칙주의자의 유일한 예외, 아내 박혜숙

* [민청련두꺼비열전] ② '남영동도 별거 아니네'... 대공분실 수사관을 가르친 남자(https://omn.kr/2fwx9)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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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최민화는 김근태에게 삼고초려해 민청련 의장 수락을 받아냄으로써 민청련(괄호하고 풀네임 추가) 창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민청련뿐 아니라 자신이 관여한 모든 조직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고, 자신이 모든 짐을 지고 일을 처리했다.

이영희, 강만길 탄압을 공세로 맞받아 치다

민청련 창립 후, 최민화는 상임위원장 직책을 맡았다. 동시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약칭 기사연) 연구출판부장직으로 일하며 월급 받는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 만족하며 지낼 사람이 아니었다.

민청련 창립 직후, 이른바 '기사연 통일문제 사건'이 터졌다. 당시 기사연은 조사연구사업의 하나로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3년 10월 말, 이 사업에 참여한 교사들이 비밀리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어서 연구를 지도한 이영희 교수와 강만길 교수, 그리고 기사연 원장 조승혁 목사까지 연행돼 조사를 받는 사태로 확대됐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이 사건을 '용공 간첩 사건'으로 조작해, 정권에 눈엣가시였던 이영희·강만길 같은 반정부 지식인들을 매장시키려 했다.

최민화는 곧바로 사건 해결에 나섰다. 기사연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와 교회와 사회위원회를 끌어들였고, 세 기관이 함께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사건을 단순히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일 논의 전반에 대한 공세로 전환하기로 했다. 대책위원회 명의로 "민족 통일의 주체는 국민이며 특정 기관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나아가 그는 조직을 확대해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정의구현전국사제단, KNCC가 공동 성명을 내도록 주도했다. 성명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통일 문제 논의가 보다 민주화되는 계기를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결국 치안본부는 국내외 여론에 밀려 이영희·강만길·조승혁 3인에 대해 공소보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3인이 위법을 인정하고 개전의 정을 나타냄에 따라 석방한다"며 신문과 방송을 통해 세 사람이 쓴 반성문과 인터뷰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공소보류란 주로 남파 간첩에게 적용하던 조치였다. 간첩이 남파되자마자 검거된 경우, 수사 과정에서 북한의 기밀이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다른 간첩 검거에 협조하는 등 당국에 유리한 활동을 할 때 적용하는 조치다.

한편 남영동 대공분실 측에서는 대책위를 이끌던 최민화가 남영동에 들어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세게 들이받았다. 대책위는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실이 이처럼 왜곡당하기보다는 차라리 공정한 재판 과정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했다. (중략) 이 세 분은 45일 동안 정신적 고문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석방을 조건으로 하여 강제 진술 내용을 반복 연습시켜서 이를 마치 자연스러운 석방 인터뷰인양 여론을 조작했다. (중략) 우리는 세 분의 정신적 상처가 하루속히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당국에 대해서는 그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해 줄 것과 인권침해의 성격을 지닌 공소보류 조치를 하루속히 철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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