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임금에 대한 탄핵 절차를 성문 법률로 정해두지 않았다.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군주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는 비상사태하의 군주 교체가 신속히 진행됐다. 군주 폐위에 관한 관습법 혹은 관행이 단순했던 데도 원인이 있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하에서는 3대 기관이 탄핵 정국을 주도한다. 대통령을 탄핵심판에 넘기고 심판에 참여하는 국회, 대통령에 대한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헌법재판소, 대통령의 직무를 대신 수행하는 대통령권한대행이 상황을 이끈다.
대통령과 관련된 비상시국 권한을 분점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두 행위주체가 이런 정국을 주도했다. 궁궐 점령 등을 통해 정권 장악력을 과시하는 정치세력, 그리고 왕실을 대표해 비상대권을 행사하며 군주 교체를 승인하는 대비다. 전자는 실질적 최고 권력을, 후자는 형식적 최고 권력을 갖고 시국에 대응했다.
차기 군주와 소통 없이 '반정' 일으킨 신하들양대 기구의 협업에 의한 비상사태 극복 시스템이 가장 잘 발현된 사례가 1506년의 연산군 폐위다. 중종반정으로 불리는 이 사례에서는 일반적인 역모 사건에서 당연히 등장하는 것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정권교체가 무난히 성사됐다.
비합법적 왕위 교체를 추진하는 세력은 차기 군주와 사전 교감을 해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중종반정 때는 그것이 없었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진성대군(중종, 당시 18세)이 정변 발생 직후에 자결을 시도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변 발생 몇 시간 뒤인 1506년 9월 17일(음력 9.1) 24시 전후에 반군이 진성대군 저택을 에워쌌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수록된 <국조기사(國朝記事)>는 이 상황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진성대군이 "놀라 자결하려 했다"라고 알려준다.
그를 만류한 사람은 부인 신씨다. 신씨는 군사들이 타고 온 말들의 머리가 우리 집 대문을 향해 있는지 반대편을 향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라며 "알아보신 연후에 죽으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말머리의 방향에 따라 포위군인지 호위군인지 판명되니 그것부터 살펴보라는 충고였다. 반정세력의 '3대장'으로 불리는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진성대군과 사전 교감을 나누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연산군은 이복동생인 진성대군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은 진성대군의 장인이었다. 이런 관계로도 얽혔기 때문에 두 이복형제는 운명공동체였다.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이자 연산군의 법적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도 연산군과 관계가 괜찮았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정현왕후를 모시고 잔치를 했다거나 연꽃 구경을 했다는 기사가 많다. 이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으니, 진성대군이 반군을 보고 극단적 생각을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