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에 관련된 일을 정치권이 문제 삼고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0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김민석 후보자는 80년대 학생운동 시절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 실형을 받았다"라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총리직을 수행하며 한미동맹을 공고히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김문수 전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는 지난 5일 대선 캠프 해단식에서 "아마 미국에서 굉장히 이걸 문제를 삼을 것"이라며 "그동안은 적당하게 넘어갔지만, 미국 정부가 자기 문화원을 점거한 이런 사건에 대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1980년대 전반에 집중 발생한 미문화원 공격 사건을 다시 들추는 것은 미국을 당황케 만드는 일일 수 있다. 1980년 12월 9일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1985년 5월 23일의 서울 미문화원 점거의 공통점은 5·18 진상규명과 사과 촉구다. 그래서 이 사건이 자주 부각되면 미국이 곤란해질 수 있다.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환수(1994.12.1.)되기 이전인 1980년에 전두환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대규모 학살을 벌인 일은 미국의 묵인 없이 불가능하다. 5·18 현장에 있었던 아놀드 피터슨 선교사는 미군의 시스템이 광주 현지에서 작동한 사실을 <5·18 광주사태>에서 증언했다.
체험록인 이 책에서 피터슨은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한 다음 날인 그해 5월 22일에 "송정리에 있는 미 공군 기지에서 일하고 있는 공군 하사인 데이브 힐이라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고 회고했다. 피터슨은 "그는 미 공군이 무력으로 광주에 들어와서 양림동에 있는 미국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계획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책에 썼다.
피터슨은 계엄군이 도청을 탈환하기 이틀 전인 25일에도 미군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미 공군이 자신과 동료들에게 "한국 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알려주면서, 헬리콥터에 의한 미국인 구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통지한 사실을 증언했다. 이처럼 미군은 광주 현장과 무관치 않았다.
1980년대 학생들이 미문화원에 들어간 이유피터슨의 체험록에는 5·18과 미국의 관련성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 하나가 들어 있다. 한국군 최정예 부대이자 경기도 양평 주둔 부대인 육군 20사단이 어떻게 광주까지 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은 언론보도를 근거로 "이 사단은 1980년 5월 16일에 미국 지휘하에 있는 한미연합사에서 탈퇴했었다"라며 "이 일은 위컴 대장이 협정에 따라 한국 육군참모총장의 통보를 받고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기술한다.
피터슨 목사가 미군으로부터 "한국 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필리핀 수빅만 기지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려 했었던 미 제7함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방향을 틀어 부산에 입항하는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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