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 없는 나라를 꿈꾸다'... 탕평 정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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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탕평 정치는 정치지도자들의 로망이었다. 51%의 리더로 남고 싶어 하는 지도자는 없었다. 지금은 양당제 국가인 미국의 초창기 지도자들도 탕평을 지향했다. 이들은 정당 자체를 아예 없애고 싶어 했다.

<한국동북아논총> 2001년 제18집에 실린 윤용희 경북대 교수의 논문 '미국 양당정치의 형성과 발전 요인'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정당과 도당을 동일시하여 합중국 전체 이익에 위반된다고 정당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였다"라며 "제3대 대통령 제퍼슨도 정당을 반대하면서 1789년 '만약 내가 꼭 정당과 함께 천국에 가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고 기술한다.

자유당이라는 악명 높은 정당과 함께 연상되는 이승만 역시 정부수립 전만 해도 정당 무용론을 내세웠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탕평 정치가로 기억되고 싶어 했던 그는 한민당과의 제휴가 깨진 다음 달인 1948년 9월 9일 담화에서 "민주주의를 운영하려면 우리에게도 정당이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의 홍범 편은 군주가 나라의 표준이 되는 '황극(皇極)의 정치'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일반 백성들이 은밀히 뭉치지 않고 높은 사람들이 뭉치지 않는 것은 임금이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치우침이 없고 당을 만들지 않으면 황도가 탕탕(蕩蕩)하고, 당을 만들지 않고 치우침이 없으면 황도가 평평(平平)하다"라는 말로 황극의 실현 방법을 설명한다.

이 같은 '탕탕평평' 이념에 근접한 정치 질서가 한국에서 본격 구현된 것은 조선 영조(재위 1724~1776) 때다. 그와 그의 손자인 정조의 재위기는 탕평 정치의 모범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즉위 당시의 영조는 탕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후세에 탕평의 모범으로 기억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이복형이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1720년 7월 17일(음력 6.13)에 32세 나이로 왕이 됐기 때문에, 애초에 그가 즉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다수파인 노론당의 억지였다. 이들은 소론당의 지지를 받는 경종을 압박해 영조를 후계자로 세웠다. 경종이 아직 젊은데도 그에게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이복동생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만들었다. 이때가 1721년 10월 10일(음 8.20),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3개월 뒤였다.

노론당이 싫어하는 장희빈을 어머니로 둔 경종은 노론세력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1724년 9월 18일(음 8.2) 병석에 누웠다. 어의들의 치료가 시원치 않다며 자신이 해보겠다고 나선 그의 이복동생은 10월 6일에 게장과 생감을 먹이고 10월 10일에 인삼탕을 처방했다. 게장과 생감은 서로 상극이고, 인삼탕은 그날 경종이 먹은 탕약과 상극이었다. 경종은 10월 11일(음 8.25) 사망했다. 관행에 따라 닷새 뒤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당 임금과 소론당 조정의 동거 기간이 지난 뒤 노론당 정권이 등장했다.

이처럼 영조의 즉위는 치열한 당쟁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 영조의 이미지는 탕평과 거리가 멀었다. 그가 탕평의 의지를 갖는다고 해서 이뤄질 일도 아니었다. 노론이 지지해 줄 리 만무했다. 소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론과 한편인 군주를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즉위 당시에는 탕탕평평의 실현이 요원했다. '만약 내가 꼭 노론당과 함께 천국에 가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영조가 힘주어 말한다 해도, 믿을 사람은 별로 없었다.

탕평의 디딤돌이 된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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