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무엇을 줄까" 아닌 "어떻게 함께"를 고민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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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두 달째를 맞은 이재명 대통령이 보름 전 광주광역시를 방문했습니다. 군 공항 이전, 광주·전남의 초광역 협력,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논의의 장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언론은 이에 대해 지역이 준비되지 못했다고 평가했고, 일부 시민들은 지방정부의 대응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단순한 준비 부족으로만 해석하기보다는, 중앙과 지방 간 소통의 구조적 한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들어줄까, 말까?"는 시혜적 논리

국가 운영의 무게 중심은 점점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모든 해법이 결정되고 지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삶의 문제는 삶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풀려야 하며, 그것이 바로 지방분권의 철학입니다.

정부가 지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는 방식은 20세기 중앙집권 국가의 시혜적 논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역의 문제를 중앙의 틀에서만 해석하고 판단하는 이러한 프레임은 자치와 협치라는 21세기 행정철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지역을 도와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해나갈 것인가"가 새로운 시대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지방분권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되기도 합니다. 자주·자립·자치. 이는 단순한 행정구조의 변화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에 대한 혁신적 전환입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이미 19세기 초에 "지방정부가 강하면 민주주의는 강해지고, 지방정부가 약하면 독재는 가까워진다"고 역설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삶의 현장에서, 곧 지방에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지방정부는 '자치의 주체'로 존중 받아야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하위 기관이 아닙니다. 헌법상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모두 '국가기관'으로,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 지방은 여전히 중앙의 결정에 의존해야 하고, 예산을 따기 위해 수차례 상경을 반복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중앙 부처의 공무원들은 때때로 이를 '평가의 대상'으로 보며, 지방 공직자들은 늘 '설득'의 자세를 강요 당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현실이 참담합니다.

"지역을 잘 아는 사람보다, 서울을 잘 아는 사람이 예산을 더 잘 가져온다."

현장의 경험보다 인맥이, 헌신보다 줄이 우선되는 이 씁쓸한 현실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방의 유권자들은 그 지역을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거나, 살았어도 지역 현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에게 표를 줘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산을 따올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중앙부처의 관료 출신, 정치권 핵심과 연결된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역에서는 그들에게 '실력자'라는 이름표가 붙습니다. 그러나 과연 실력이란 무엇입니까?

정작 지역에서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 주민과 눈을 맞추며 함께 울고 웃었던 이들, 애향심과 책임의식으로 지역의 미래를 설계해온 이들은 뒷전입니다. 도덕성도, 전문성도, 정책에 대한 비전도, 과거의 성과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힘센 누군가와 얼마나 가까운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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