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개혁가인 정암 조광조는 고려시대 개혁가인 신돈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 신돈은 승려이고 조광조는 선비였지만, 두 사람의 역사적 역할은 흡사했다. 1365년에 역사무대로 뛰어오른 신돈과 1516년에 그 무대를 장악한 조광조는 151년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거의 비슷한 과제를 수행했다.
신돈은 공민왕으로부터 전권을 받은 뒤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중앙 무대에 안착시켰다. 신진사대부는 지방에 거점을 두고 중소 규모 토지를 보유한 유교적 교양인들이었다. 최상층 부자가 아닌 이 세력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고 중앙 진출을 도모하는 현상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이 상황에서 권문세족 숙청에 앞장선 인물이 신돈이다.
조광조는 중종 임금으로부터 전권을 받아 개혁세력인 사림파의 집권을 성사시킨 뒤 기득권층인 훈구파를 약화시켰다. 사림파는 신진사대부의 후예였으니, 신돈이 했던 일을 조광조가 뒤이은 셈이다.
두 사람은 역사무대에 올랐다가 퇴장하는 모습도 비슷했다. 군주가 신진 인물을 전격 발탁해 전권을 맡긴 뒤 군주 자신은 뒤로 물러서고, 신진 인물이 군주의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구세력을 숙청하는 양상이 전개됐다. 그 신진의 권력이 왕권을 위협하기 직전에 의문의 역모사건이 발생해 신진이 처형되는 비극이 똑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신돈이 등용시킨 세력은 불교 승려들이 아니라 유교 사대부들이다. 그런데도 선비들은 그를 '요승'으로 폄하했다. 공민왕이 그를 깎아내린 결과다.
조광조 역시 1520년에 처형될 당시 중종에 의해 폄하됐지만, 광해군 때인 1610년에 국가 공인 현자의 반열에 올랐다. 성균관 대성전 같은 공자 사당에 공자와 함께 모셔지는 문묘종사(문묘배향)로 인해 조광조는 그해에 국가적 스승의 위상을 갖게 됐다. 이는 그를 따르는 세력이 1567년에 집권한 결과다. 그래서 그는 요유(妖儒)로 불릴 일이 없게 됐다.
신돈의 지원에 힘입어 지배층이 된 신진사대부의 일부는 중앙 정계에 들어간 뒤 조선 건국에 참여했지만, 그보다 많은 또 다른 일부는 조선 건국을 비판하며 지방에서 활동했다. 그런 그들을 중앙 정계로 다시 끌어올린 인물이 조선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재위 1469~1495)이다. 성종이 그렇게 한 것은 수도권에 기반을 둔 대토지 소유자들인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에서였다.
비교적 평화롭게 이뤄진 지배층 교체사림파라는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의 후예는 얼마 뒤 연산군 치하에서 사화(士禍)라는 시련을 겪었다.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 등은 신진세력을 견제하고 길들이려는 연산군의 의도가 투영된 사건들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