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소년공'이 이 대통령에 전한 말 "국가 사과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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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공 출신'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는 날, 또 다른 소년공 출신 한 남성은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았다. 기자 한 명 없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그가 네 줄짜리 문장이 적힌 손팻말을 쥐고 햇빛을 받으며 말없이 서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그가 유일하게 입을 뗀 건 손팻말 문구를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로 외칠 때였다.

"국회는 집단 수용시설 / 진상규명을 강화하고 / 피해생존인의 권리를 반영한 / 과거사법 즉각 개정하라!"

구호를 제외하면 한마디 말도 없던 문호현(48)씨가 국회를 찾은 이유를 털어놓은 건 인근 카페로 장소를 옮긴 뒤였다. 25일 기자와 만난 그가 "1989년 9월쯤이었다"라며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아원 등을 전전하다 12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강제로 보내졌다는 '그곳', 목포역에서 도보로 20km 남짓 떨어진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그곳을 설명하기 위해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었다.

"거긴 고아원이 아니라 교도소예요. 완전히 삼청교육대라니까, 형제복지원이랑 똑같다니까."

바닷가 소년공, 그 고통의 증언

동명원.

1967년 전남 목포시 대성동 211번지의 '성덕부랑아보호소'로 시작해 1972년부터 운영돼 온 부랑아 수용시설. 아동을 대상으로 감금, 폭행·가혹행위, 강제노역 등 인권침해가 발생한 곳. 1967년부터 1983년까지 매 연말 기준 90명(평균 입소자 145명, 퇴소자 152명)을 수용했다고 법인 대장에 나오지만, 실제론 180명 이상을 수용한 것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판단한 그곳.

이후 전남 무안군 청계면으로 이전한 동명원은 1984년 현 위치인 청계면 복길리 산57 일대 부지(5959㎡·180만 2598평)에 시설을 신축했다. 1988년엔 시설장 둘째 아들이 무안군 삼향면 지산리 농공단지에 산업폐기물 포장재를 만드는 금호포리머 주식회사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동명원의 수익사업으로 활용됐다. 1989년 12월부터 1993년 3월까지 동명원 수용 아동 20여 명이 이곳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됐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문씨의 증언은 다만 초점이 달랐다. 농공단지로 공장이 이전하기 전 동명원에서 2.7㎞ 떨어진 복길나루터(무안군 청계면 복길리 556) 해변에 금호포리머로 불리는 공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금호산업' 간판을 달았다는 이 공장에 문씨의 고통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바닷가에 금호포리머가 있었어. 거기서 3년을 일했지. 날마다 안 맞은 적이 없어. 겨울엔 영하 20도 바닷물에 들어가게 하는데 진짜 죽지. 그때 같이 일했던 20명 이름을 내가 지금도 다 기억하잖아."

2시간 넘는 증언이 이어졌다. 동명원으로 문씨와 함께 끌려갔다는 동생 문인현(44)과 그보다 4년 전 끌려갔다는 동료 이현주(52)가 옆에서 증언을 보탰다. 지난 4월 동명원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 결정서가 이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이현주는 신청인으로 진실규명 대상자, 문호현·문인현은 미신청인으로 참고인).

강제노역 3년, 세 번의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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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장에선 크고 작은 섬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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