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선 진보당 수원시의원 "억울함 알게 된 뒤, 약자의 설움 더 크게 보였다"

2022년 5월 어느 퇴근길 저녁, 성균관대역 마을버스 정류장. 버스를 기다리던 중 한 여성이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진보당 수원시의원 후보 윤경선.' 그는 자신을 후보의 딸이라 소개하며 "꼭 한 표를 부탁한다"라고 말했다. 선거는 텔레비전 속 거대정당의 전유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렇게 골목과 버스정류장에서, 또 생활의 가장 작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날 이후 윤경선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네 곳곳에 붙은 선거 현수막에도 자연스레 시선이 머물렀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풀뿌리 정치가 어떻게 삶과 맞닿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관심이었다.

이 인터뷰는 한 지방의원의 이력을 적어두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치를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체온을 확인하기 위한 시도다. 지난 12일 오후 4시, 수원특례시의회 의원 사무실에서 윤경선 의원을 만났다.

IE003522710_STD.jpg

노동현장에서 의회로

윤경선 의원의 출발점은 정치가 아니라 노동현장이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교직에 몸담았지만 접어야 했고, "억울한 사람의 사정을 함께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위장취업을 택해 공장으로 들어갔다. 대학 시절 야학 교사로 활동했고, 이후에는 노조 활동에 뛰어들며 노동 현장과 함께했다.

"정치를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대학 때 야학을 했고, 졸업 후엔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당에서 제가 서울대 출신이고 시민단체 활동도 했다고 '나가달라'는 권유가 있었죠. 그때는 '노동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커서 흔쾌히 승낙했는데, 그게 평생이 될 줄은 몰랐죠."

그의 당적 변화는 단선적인 입장 이동이 아니라, 같은 뿌리를 달리 부르는 이름들의 역사였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민중당을 거쳐 지금의 진보당까지. 윤 의원은 "한 번도 탈당한 적이 없다"라며 "당명만 바뀌었을 뿐, 뿌리는 같은 길"이라고 강조했다.

억울함의 기억, 약자의 눈으로

한국 현대정치에서 정당 해산은 극히 드물고, 그 자체로 거대한 사건이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대 1의 의견으로 통합진보당을 '헌법 질서를 위배한 정당'이라며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 결정은 민주주의 원칙에 비춰볼 때 과도했다는 비판도 동시에 제기됐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도 "정당 해산은 민주적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우려가 나왔다.

국회의원 5명이 의원직을 상실했고, 전국의 100여 명이 넘는 기초·광역의원들이 하루아침에 무소속 신분이 되었다. 무엇보다 남은 이들에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남았다. 윤경선 의원 역시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너무 억울했어요. 내가 잘못해서 욕먹는 건 감당할 수 있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데 사회적 비난을 받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경험이 결국 약이 됐습니다. '억울한 사람의 심정'을 몸으로 알게 됐고, 교만하지 않게 됐어요. 저는 가톨릭 신자인데 '고통의 신비'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고 할까요."

그는 이 경험을 정치적 언어로 전환했다. 다수정당과 행정 권력 속에서 소수정당 의원이 감당해야 하는 불리함과 서러움은 오히려 그의 시선을 더 약한 쪽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 시민의 정당"을 자임하다

윤 의원은 지금의 진보당을 "보통 시민의 정당"이라고 정의한다. 민주당을 '중도 보수'라 본다면, 진보당은 '중도 좌파'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그가 반복해 언급한 키워드는 노동·약자·평화·생태·여성 연대였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