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의 파시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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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은 단순히 윤석열 개인이 충동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 그가 막강한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기는 했어도, 내란을 통해 이런저런 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고급 관료와 장성 그리고 정치인이 없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고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기반이 중요하다.

비록 그는 인기 없는 대통령이긴 했어도, 어떤 경우에도 그를 지지할 20~30% 내외의 지지자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계엄 실패 후 윤석열은 중국 혐오와 부정선거라는 거짓 선동을 통해 특히 바로 이들을, 자신을 위한 적극적 수호 부대로 만들려 했는데, 이런 시도는 꽤 성공을 거두었다. 1.19 서부지법 폭동, 전광훈 목사와 손현보 목사가 주도했던 극우 집회들, '백골단'이나 '자유대학' 같은 청년 극우들의 준동 등은 바로 그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12.3 내란은 파시즘이 21세기 한국에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발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과거의 파시즘에서는 특히 '폭민(暴民;mob)'이라고 규정되는 대중들이 지도자와 일체감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나서 정치적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나 세력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와 혐오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열성적 대중 동원은 파시즘을 단순한 군부 독재와 구분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다. 다른 사안들은 제쳐두고라도, 윤석열의 내란 시도와 그 이후의 사태 전개에서 이런 파시즘적 징후를 읽어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런 식의 광범위한 극우 대중, 특히 '청년 극우'의 준동이었다.

극우 포퓰리즘의 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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