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청련두꺼비 열전]
① 들녘 같은 사람' 최민화(https://omn.kr/2ftf2)에서 이어집니다.
최민화는 늘 주위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화내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운동'에 몸담으며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뚝심과 자신만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원칙에 가르침을 준 이들은 함석헌, 장준하, 김지하, 문익환 같은 이들이었다.
기를 보여준 최초의 사건최민화 일생에서 그다운 결기를 보여준 최초의 사건은 1975년에 있었던, 이른바 '미인계 사건'이었다.
최민화는 1974년 4월 발표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12년이란 형량을 선고받았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과 운동권을 사회에서 격리하려는 독재정권의 대대적 탄압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조작된 탄압 사건으로 지탄받았고, 결국 정권은 1년도 안 돼 대부분의 구속자를 형집행정지로 풀어줬다.
구속자들은 풀려났지만,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외국 국가 원수나 국제적인 인권 단체에서 방한하게 되면, 그들은 불법적으로 연행돼 지방 먼 곳으로 강제 여행을 해야 했다. 1975년 3월 29일, 최민화는 강의실에서 수업받던 중 경찰서 정보과 수사관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당시 한국의 민주화에 많은 관심을 보인 미국 프레이저 의원이 이끄는 아시아·태평양지역 소위원회가 민청학련 사건의 고문과 조작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또 영국에 본부를 둔 앰네스티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대표단을 보내왔다. 이에 한국 정부는 그들이 만날 만한 30∼40명을 강제 연행해서 지방으로 빼돌렸다.
최민화는 수원에서 온양으로, 예산 수덕사를 거쳐 장항으로, 다시 군산을 지나 전주로 정신없이 끌려다녔다. 자정을 넘어서야 전주 한복판의 한 여관방에 누울 수 있었다. 피로가 겹쳐 선잠에 들 즈음, 등 뒤로 뭉클하고 뜨뜻한 체온이 느껴져 왔다.
이상한 감촉에 깨어 돌아보니, 동행한 기관원은 보이지 않고, 낯선 사람이 동의도 없이 몸을 더듬고 있었다. 최민화는 주인장을 부르며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20여 분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틈을 타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온 최민화는 명동성당 전진상 교육관 위층의 수녀원으로 가 수녀들의 보호를 받으며 몸을 숨겼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 BBC 방송 제작팀이 찾아와 여러 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동아일보>는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과 앰네스티가 한국 인권 문제를 조사하려 하자, 당국은 그들이 만나려던 민주 인사들을 '관광여행' 시켰으며, 최민화군의 경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분노와 서글픔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알려져 박정희 독재정권의 실상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최민화에게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즈음 최민화가 이화여대 학생회 임원들과 모임을 갖게 됐는데, 한 학생 간부가 "정말로 아무 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최민화는 정색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고 단호히 답했다.
난감해하던 그는 갑자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의심 나는 자여, 다 내게로 오라!" 일행은 그 말에 박장대소하며 배꼽을 잡았고, 모임은 즐겁게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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