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이 월북으로 조작된 사례가 있다. 1970년대 대표적 조작사건 중 하나인 태영호 납북이 그것이다.
어선 태영호의 탑승자는 8명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사는 강대광(선주), 정몽치(선장), 박헌태, 이종섭, 박상용, 강용태(이상 선원), 전남 여수에 사는 박종윤(기관장), 박종옥(선원)"이었다고 알려준다.
민주공화당 정권이 대통령 재선(1967.5.3.)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3선 개헌 국민투표(1969.10.17.)를 향해 나아가던 때인 1968년 6월 4일이었다. 이날 목조기관선인 태영호가 위도면에서 출항했다. 이 배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인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 해역으로 가서 병치잡이를 했다. 그러던 중 7월 3일,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북한의 표적이 된 어민들'남조선혁명과 통일은 동시에 이루어지리라'는 김일성의 구상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벽에 부딪혔다. 북한 군대가 무너트리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이 남한 민중에 의해 붕괴되자, 김일성은 남한 민중이 만만치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는 남한부터 먼저 혁명시킨 뒤 그 뒤에 통일을 추진한다는 남조선혁명론을 1961년 9월 제4차 조선노동당 당대회에서 천명했다.
북한은 남조선혁명을 유발시킬 위와 같은 목적과 더불어, 베트남전쟁에 투입되는 미국의 군사 역량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1960년대 후반에 무장공비들을 대거 파견했다. 미국 외교협회가 2011년 11월 10일 발표한 <한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문가들이 1955~2010년까지의 한반도 군사충돌로 인정한 1436건 중에서 49.4%인 709건이 1960년대 후반에 발생했다.
이 시기에 김일성 정권은 북에서 남으로 무장공비를 파견하는 동시에 남에서 북으로 어민들을 납치했다. 남한 주민들에게 북한의 발전상을 보여줘 남한 민심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북한 경제가 남한을 앞섰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런데 육로를 통해 농민들을 납치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민들이 표적이 됐다.
1970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 '귀환어부 좌담회'는 "최근 들어 북괴는 걸핏하면 생업에 종사하는 무고한 어부들조차 마구 납치해 허위선전, 강제 관광, 간첩 지령까지도 서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북에 의한 '강제 관광'은 '수학여행'으로도 불렸다. 1968년 12월 3일 피랍됐다가 귀환한 속초 어민 남기룡은 만경대대극장·황해제철소·청산리협동농장 등을 답사했다. 그런 곳들을 둘러본 소감을 남한에 가서 홍보하라는 게 북의 요구였다.
태영호 납북 때까지만 해도 남한 정부는 납북어부들을 가급적 처벌하지 않았다. 위의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는 "당시에는 고의로 월선하였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는 한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이 통례였다"고 말한다. 월선했더라도 고의 입증이 되지 않으면 처벌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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