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회 폭력의 기원... 재떨이 던지고 유혈사태 일어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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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서울남부지방법원이 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과 관련해 나경원·송언석·황교안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폭력과 날치기 등으로 얼룩졌던 한국 국회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디딤돌이 될 만한 판결이다.

정치인들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서 폭력을 쓰는 양상은 해방 이후에 본격화됐다. 임금 앞에서 어전회의를 하던 1910년 이전에는 정치가들이 그런 자리에서 심한 언쟁을 하는 일은 있어도 폭력을 행사하기는 곤란했다.

해방 직후의 정치 문화는 매우 폭력적이었다. 미군정과 극우세력은 대화와 타협이 아닌 테러와 학살을 통해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런 풍조가 인심을 흉흉하게 만들고 정치인들을 거칠게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 의회 문화의 발달에 걸림돌이 됐다.

재떨이와 명패는 어쩌다 '무기'가 되었나

미군정을 뒤이은 제1공화국 때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뭔가가 날아다니는 일들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 정책을 밀어붙일 때도 그랬다.

1875년에 출생한 이승만은 37회 생일인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돌아온 것은 70세 때인 1945년 10월 12일이다. 33년간 한국을 떠나 있었던 그는 젊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고 싶어 했다.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에 제정한 한글맞춤법에 대해 거부감을 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밥이'를 '바비'로 표기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그의 지론이다. 1950년 2월 3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잇다'와 '있다'가 무엇이 다른가?"라며 "문화를 진보시키려면 하로바삐 고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4일 자 <조선일보>). 이런 논리에 따르면, '있다'와 '잊다'도 똑같이 발음되므로 굳이 ㅈ 받침을 쓸 필요가 없게 된다.

'한글 간소화' 정책은 여론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이것은 무조건 밀어붙일 사안이 아닌데도 이승만 정권은 강행했다. 자유당이 제3대 총선(1954.5.20)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뒤인 1954년 7월 7일, ㅈ·ㅌ·ㅋ·ㅌ·ㅍ·ㅎ 받침을 폐기하는 등의 한글 간소화 방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자유당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토론 절차도 성급히 종결시켰다. 이것이 국회 폭력을 유발시켰다. 그달 12일 자 <동아일보> 보도다.

"야당 측의 이인·김상돈·조영규·장택상 등 제군(諸君)으로부터 언권(言權)봉쇄라 하여 명패를 치고 재떨이를 까며 의사당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지르는 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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