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얘기한 것처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릴 수 있을까'라는 말이 실감나는 날이었어요."
계엄령이 선포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은 그 날을 이렇게 떠올렸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 대한민국은 혼란에 빠졌다. 모두가 긴장하고 사태를 주시하던 그 시각, 신 의원은 국회로 향했다.
"어차피 나는 잡혀가서 오래 감옥에 있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죠."
실제, 목숨을 건 찰나였다. 그는 경찰들이 막아선 국회 3문 앞에서 "누가 국회의원의 길을 막느냐"며 호통을 쳤고 길을 뚫어냈다. 이내 국회 본청에 진입했고, 다른 의원들과 함께 계엄 해제를 이끌어냈다. 국회 본회의장 안팎으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지고 무장한 계엄군이 로텐더 홀까지 침입하던 순간 신 의원은 "바깥으로 나가 경찰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이 안에서 계엄 해제를 의결하는 것이 임무"라는 생각 뿐이었다고 했다.
국회 안 190명의 의원들과 국회 밖 국민이 함께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켜냈던 밤이 1주년을 맞았다. 계엄 선포 후 1년 그리고 하루가 지난 12월 4일, 서울여자대학교 학생 13명은 신 의원과 국회에서 만났다. 신 의원에게 그 날의 기억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에 대해 물었다.
"80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작년 12월 3일은 피를 보지 않은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렇기에 신 의원은 극단주의가 민주주의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지금 한국 정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신 의원과 나눈 일문일답 정리본이다.
긴박했던 '그 날의 기억'- 2024년 12월 3일 밤의 기억을 듣고 싶습니다.
"그 날 마지막 점검차 뉴스를 틀었는데, (윤석열이) 담화를 하더라고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이러다가 계엄 선포하겠단 말을 하겠다 싶었는데, 정말 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우리 당 의원들한테 즉각 알렸죠. 곧바로 국회로 향했는데, '증발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사람 많은 카페로 이동한 후 카카오 택시를 불렀습니다. 국회에 도착하니 정문에서 경찰들이 막고 있었지만, 지휘관에게 호통을 쳐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잡혀가더라도 본회의장 안에서 잡혀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고, 오직 계엄 해제를 의결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바깥으로 절대 나가지 않았는데 보좌진이나 국회 직원들이 밖의 상황을 담은 사진을 보내주더라고요. 헬리콥터가 내리고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 홀까지 들어오는 등 매우 긴박한 상황이었어요. 저는 그 순간 '나는 잡혀가거나 죽겠구나' 하고 각오했습니다. 결국 계엄 해제 의결이 되었지만, 2차 3차 계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저희 모두 그냥 본회의장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 계엄 직후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회관에서 지내다 씻으러 갔는데 평소 잘 지내던 국민의힘 의원님을 마주쳤을 때 가장 힘들었어요. 도저히 얼굴을 못 쳐다보겠는 거예요. 왜냐하면 당일 실제로 전 총구 앞에 있었던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총구 반대편에 서 있었잖아요. 그 반대 편에 서 있던 사람 중에는 제 대학 동기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얼굴을 못 보겠더라고요. 쉽지 않았어요. 그날 본회의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 계엄을 해제해서 윤석열 저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되겠다고 작정을 하고 온 사람들이에요. 표결 안 들어온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계엄의 밤 이후에는 정말 얼굴 쳐다보기가 힘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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