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이 금지되기 30분 전이었다. 충북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불청객은 주변에 행인이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법원 정문으로 향했다.
당시 청주지방법원은 청주극장 옆에 있었다. 1908년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이 개설되면서 운천리(현 사직동) 용화사 근처에 청사가 설치되었다. 2년만인 1910년 한일합병과 동시에 남문로2가 옛 현대극장 자리로 청사를 이전했다.
합선 가장한 방화목조건물이었던 법원은 '미음'자형 건물로 항상 개방되어 있었다. 현관 앞에는 우산 모양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불청객의 눈에는 예쁘게 다듬어진 은행나무가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서무과, 서기과, 소법정 등에 이어 대법정, 민형계(民形係, 등기과와 접수계가 있음), 법원장실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등기창고와 증거품 보존창고, 판사실, 호적과, 치안관 심판실, 회계과가 있었다. 이어서 숙직실, 목욕탕, 취사장 등이 있었다. 총 부지 300평(990㎥)에 건평 150평(495㎥)의 건물이었다.
불청객은 법원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성큼성큼 목표지점으로 걸어갔다. 우선 회계과 전기선을 절단하고 플러스·마이너스 선을 연장해서 회계계장 김상갑과 이상길 책상 중간의 마룻바닥에 늘어뜨려 겹쳐놨다. 그 주변에는 고무판, 목제결재함, 휴지 등 가연성 물질을 놓았다. 그런 후에 휘발유를 뿌리고 절단된 선을 다시 이은 후 밖으로 나왔다.
불청객이 법원을 불더미로 만들 준비를 하고 나오는 동안 또 다른 불청객은 법원 정문 밖의 전봇대에서 법원으로 들어가는 전선을 절단했다. 법원 안으로 들어갔던 이가 나온 후, 밖에 있던 이가 절단된 전선을 재접선시키면서 합선이 되었다. 회계과 안의 전기선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그로 인한 불씨가 휴지와 나무, 휘발유에 옮겨졌다. '화르륵'하며 불은 근처의 책걸상과 서류로 번졌다.
문제의 그 날, 숙직은 서기 강희상 외 2인이었으며, 추가로 숙직실에서 취침한 이는 운전수 황창록과 조수 노석동이었다. 장거리 출장에서 돌아온 황창록이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와 숙직 근무자들과 가볍게 한 잔씩 마셨다. 그들이 잠자리에 든 것은 오후 10시 30분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 뒤에 정전이 되었다.
당시 정전은 비일비재했던 일이라 선잠에 빠져 있던 숙직자들은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벌떡 일어난 이들이 냄새가 나는 방향을 향해 뛰었다.
초겨울 바람이 건물 내로 들어오면서 불길은 사정없이 번졌다. 치안관 심판실이 불길에 삼켜졌고, 소방대가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서무과와 소법정, 호적과와 판사실이 차례로 화염에 휩싸였다.
숙직실 근무자와 소방대는 건물 자체보다는 서류 보존에 초긴장을 했다. 사건기록과 각종 재판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 서류는 간신히 건졌으나 건물 2/3가 불타버렸다. 1948년 11월 27일 오후 11시 40분에 벌어진 청주지방법원 방화사건이었다.
파면 때문에?사건 발생 후, 충청북도 경찰국 수사팀이 구성됐다. 경찰은 애초에 화기 단속의 소홀로 인한 화재로 단정했다. 하지만 숙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수사에서 아무런 혐의점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건 다음 날인 11월 28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영웅적인 남조선 혁명가들은 27일 오후 11시 사회주의 애국자를 무자비하게 처단한 남조선 청주 반동재판소를 불태워 없앴다. 이것은 남조선재판소 말살 공작을 개시한 이래 광주·전주에 이어 세 번째 있는 애국적 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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