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내밀고 손 잡아주는 연대의 힘을 체감한 광장에서 1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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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계엄 이후 거리로 나온 시민들. 그들이 모일 수 있었던 곳엔 언제나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 중 하나였던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아래 참여연대) 활동가 김혜란님을 만나, '광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금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들어보았다.

-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직후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집에서 애들 재우고 있었어요. 평소처럼 조용한 밤이었는데, 단톡방에 '계엄'이라는 메시지가 올라왔죠. 처음에는 '가짜뉴스겠지' 했어요. 그런데 TV에 헬기가 국회에 착륙하는 장면이 나오고, 군인들이 유리창 깨고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더라요. 이게 진짜라고? 이게 2024년이라고? 그날 밤 거의 뜬눈으로 새웠고, 머릿속은 복잡했어요. 참여연대는 다음날 새벽 6시에 사무실로 모이기로 했고, 바로 나갔죠.

아침에 준비하는데 아이가 묻더라고요. 아들이 그 당시 6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 5.18을 배우고 있었거든요. 광주도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 기억이 있었나봐요. '엄마, 그거 전두환이 했던 거잖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죽는 거야?'라고 물었어요."

광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아이의 질문이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역사가 어떻게 현재로 소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네요. 지역에서는 어떻게 대응이 시작됐나요?

"저희는 상황 발생 직후 바로 움직였어요. 오송 참사 이후 꾸려졌던 시민대책위가 작동하고 있었고, 참여연대도 그 안에 있었거든요. 이미 연결망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선전전 하자고 하니까 다들 바로 반응했어요. 그날 새벽에 피켓 만들고, 유인물도 인쇄하고, 성명서도 냈죠. 충북에서는 제일 먼저 계엄 관련 성명을 냈던 걸로 기억해요."

집회는 123일 동안 이어졌다. 탄핵 결정이 가까워지면서 매일 촛불을 들었다. 광장에서 유인물을 나누고 발언 순서를 짜는 일은 반복됐고, 리듬처럼 돌아갔다. 계엄 다음날 오전에 바로 집행위가 꾸려지고 공동집행위원장이 선정되었다. 홍보팀은 유인물과 현수막을, 언론팀은 성명서와 집회 일정 조율을, 조직팀은 집회 기획을 조정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2월 3일 계엄이 터지고, 4월 4일 파면될 때까지 123일. 우리는 단 하루도 광장을 비우지 않았어요."

세대의 자리, 광장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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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을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한 학생이 '엄마가 맨날 촛불 들고 나가서 안 나가게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서 같이 왔어요'라고 발언한 게 기억나요. 웃겼지만 찡했어요. 서울 집회에 갔을 때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놀랐어요. 우리는 초를 들고 조용히 모이는데, 서울은 '삐딱하게', '다만세' 같은 아이돌 노래가 나오고, 응원봉을 들고 있더라고요. 이 경험을 지역으로 가져와서 응원봉도 구매하고 분위기를 바꿨죠. 이 과정에서 광장의 주체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젊은 친구들 정치에 관심도 없고 참여 안 하는 것 같고 그랬는데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눈으로 보니 감동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더라구요.

그리고 내가 물러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거구나 우리 선배들도 이 경험들을 다 하셨겠구나, 세대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구나 싶었죠. 나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잖아요. 한 발짝 물러서는 세대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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