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CC(한국기독교협의회) 사회선교협의회 주최로 4.19 기념행사가 서울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유신체제가 극에 달했던 1977년은 4.19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기념식을 이틀 앞당겨 4월 17일에 치르게 됐다. "선언문 낭독은 정진동 목사님이 하겠습니다." 정진동의 선언문 낭독으로 기념식은 폐회했다.
경찰서장과 담판"목사님. 빨리 피하세요!"
정보과 형사로부터 정진동을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소설가 이철용의 숨넘어가는 소리였다. 정진동은 집회에 참석한 노동자의 양복을 빌리고 검정 선글라스를 썼다.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와 함석헌, 선교사들 틈에 끼어 기독교 회관을 빠져나왔다. 물 샐 틈 없이 경계하던 형사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다. 형사들이 기독교회관 1층부터 9층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허탕 쳤다.
정진동은 청주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 소리 마세요. 쫙 깔렸어요." 조정숙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집안 상황을 이야기했다. 정진동이 집에 전화를 건 4월 18일 경찰들은 집안 곳곳을 뒤졌다. 책과 일기장, 서류들을 압수했다.
정진동은 난처했다. 물론 그가 체포나 구속을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흘 뒤 큰딸 결혼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큰딸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할 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진동은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네 경찰서장입니다." "나 정진동이요." "네?" 정진동이라는 말에 상대방인 청주경찰서장은 화들짝 놀랐다. 자신들이 그렇게 잡으려는 이가 직접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구속이 무섭지 않고 비겁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내 큰딸 결혼이 4월 21일이니 결혼식 끝나고 연행하라. 만일 이를 약속하지 않으면 결혼식도 안 갈 것이고 집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경찰서장은 흔쾌히 동의했다.
떡과 김치"신랑 나경석군과 신부 정광옥양은 일가친척과 친지를 모신 이 자리에서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할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하였습니다~." 주례 김진홍 목사의 성혼선언문 낭독이었다. 1971년 서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세워 빈민선교를 하던 김진홍 목사는 이후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에 두레마을을 세워 공동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경석과 정광옥이 두레마을에서 활동을 했기에 김진홍 목사가 이들의 주례를 맡게 됐다.
나경석은 원래 이북 출신으로 한국전쟁 전에 엄마 따라 월남했다. 엄마가 품에 숨겨 가지고 온 금붙이가 쌀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는 엄마와 형, 여동생까지 네 식구가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다.
나경석이 형에게 "고아원으로 가자"고 했다. 고아원에 가면 굶지 않고 공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형이 싫다고 해서 나경석 혼자 고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어렵게 공부한 그는 성인이 되어 남양만의 두레마을에서 일하게 되었다. 정진동 큰딸 정광옥은 일신여고를 졸업하고 1975년도부터 두레마을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게 됐다.
이런 이유로 신랑신부는 결혼식 자금을 모아둘 여력이 전혀 없었다. 신부 아버지 정진동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1973년부터 시작한 청주도시산업선교회 활동은 최소한의 생활비조차 집에 가져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지송의 주선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축의금을 보내왔다. 그마다 그 돈으로 신랑 패물(시계)을 마련한 것이 다행이었다. 예식은 사직사거리 청주산선에서 진행됐지만 별도의 피로연장은 없었다. 책상 위에 인절미와 물김치가 준비된 음식의 전부였다. 신부 엄마 조정숙은 하객들에게 미안해서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당시 결혼식 피로연에 반드시 있었던 잔치국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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