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털어 먹어가며 재봉질... 그땐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보통 디자인 샘플하고 패턴을 가지고 오면 우리가 봉제를 하는 거예요. 디자인대로 앞부분 뒷부분 패턴을 절개해 놓으면 우리가 다 붙이는 거지. 붙이는 게 우리 일이에요. 샘플만 보면 이건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머릿속에 입력이 딱 돼요. 딴 건 몰라도 옷만큼은…."

옷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자 조용조용 말을 이어가던 봉제노동자 이근표(65)의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좋아하는 일을 대하는 이의 반짝거림이 그의 눈빛에 내비친다. 여러 번 만나 들려준 그의 인생 이야기엔 50년 가까이 재봉틀을 밟아온 그대로 삶의 조각들을 정성껏 꿰매온 그의 열정이 깃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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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난 아버지 대신 열넷에 생계전선으로

아버지는 석수였다. 돌을 깨고 깎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어려서부터 알았다. 그는 1960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지만 돌산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이사를 자주 했다. 초등학교만 해도 경기도 수원에서 입학했지만 2학년 땐 서울시 강남구 대왕초등학교를 다녔고, 3학년은 서울시 광진구 광나루 근처 학교에서 보냈다. 다시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해서 결국 졸업은 이천 호법초등학교에서 했다.

호법초는 비록 3년 다닌 학교이지만 잦은 전학 탓에 친구다운 친구를 처음 사귄 곳이었다. 그래서 그에겐 이천이 고향과 다름없다. 현재 서울에 살고 있음에도 이천에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하면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이천을 좋아한다. 이처럼 이천에서 다시 전학가지 않은 건 이근표에겐 다행이었지만 가족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천에 내려간 지 2년도 안 돼서 산에서 사고가 났어요. 사고로 허리를 다쳐서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일을 거의 못하셨죠. 어머님이 고생 많이 하셨지."

된장공장, 김공장 등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어머니에게만 살림을 의존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장남에게 주어진 무게를 그도 감내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네 파출소의 소사가 됐다. 경찰관들의 잔심부름이나 문서수발 들을 했다. 경찰관들이 잘 챙겨주기는 했지만 받는 돈은 임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집에 보탬이 되지 못했다. 마침 이천 읍내에 있는 큰 잡화점에 배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도매상이어서 사고파는 물품들의 개수가 구멍가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 박스에 라면이 50개씩 들어있었어요. 그런 라면박스를 자전거 뒤에 6층으로 20박스씩 실었죠. 밀가루도 20kg짜리를 10포대씩 배달했고요. 그렇게 싣고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가 흔들거려요. 사람들이 보고 다 놀랐어요. 쪼그만 애가 어떻게 그렇게 다니느냐고. 위험하죠. 또, 힘에 붙이더라고요."

열다섯도 안 된 작은 소년이 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그의 부모는 다른 일을 수소문했다. 다행히 양복점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옛날엔 양복일 하면 하루 일해서 보름을 먹고 산다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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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점에서 도망치듯 서울로 상경

양복점 일이 잡화점 배달보다는 덜 고달프기를 희망했다. 양복점에서 숙식이 해결되니 집에선 입 하나를 덜 수 있어서 좋아했다. 심부름 하는 틈틈이 다림질 하는 법부터 배웠다. 그런데 선배들의 텃새가 심했다. "다방에 가서 커피 세 잔만 사와라" "돼지부속집에서 고기 두 근 사와라" 같은 잔심부름은 애교 수준. 가르쳐주는대로 잘 못할 때는 긴 자로 맞기도 하고, 옷 폼 잡아주는 쇠연탄 다리미가 날아오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기술자로 성장했다. 3년이 넘어가자 제법 바지, 조끼들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남성복의 마지막 단계인 재킷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기성복이 막 나오기 시작하면서 양복점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던 시점이었다. 장사가 안 되니 이근표처럼 견습생이 받는 임금은 극히 적었다. 당시 그가 받던 월급은 3만5천원 선. 1년차 우유배달원 월급이 4만2천원 정도였으니 집에 생활비 좀 보태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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