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야만의 길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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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강좌 3개를 모두 폐강한 소식을 접하고 금방 떠오른 기억은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이 겪어야 했던 기구한 역정이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이 책은 도서관에 있긴 하지만 대출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대출 신청을 하면 어김없이 신청카드에 붉은 도장으로 "금(禁)"이라고 찍혀 반려되었다. 그래서 1987년 이 책의 출판을 감행한 출판사 이론과 실천이 재판에서 금서의 족쇄를 깨뜨리고 김수행 교수께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취임한 소식을 듣고는 이제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그 기구한 운명을 넘어섰구나 하는 안도감을 가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40년이나 경과한 지금 새삼스럽게 서울대학교의 강좌 폐지 소식은 마치 작년 뜬금없었던 계엄선포와도 같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마르크스 강좌의 폐지는 서울대만의 문제도, 지금 유난스러운 문제도 아니다. 단지 서울대의 성격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사회 전반을 대표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 올린 문명을 걷어차고 야만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는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유럽은 자신의 원류를 로마로 삼고 있다. 로마는 자신들이 통치하는 문명의 세계와 구별하여 바깥세상을 야만으로 불렀는데 이때 그들이 구분한 기준은 시간의 기억이었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미래의 근원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것을 야누스 신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잊고 미래의 전망도 포기하는 것을 야만이라고 불렀다.

계엄의 선포 그 자체도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 이후 윤석열과 그의 추종자들이 벌인 행태는 과거와 미래를 깡그리 잊은 것들이었고 그것은 로마인들이 구분한 야만과 정확하게 일치하였다. 그것은 좌우의 정치노선 문제와 전혀 무관하게 문명과 구별되는 야만이었다. 평생 30년 가까이 교수라는 직업을 보내고 은퇴한 사람으로서 나는 마르크스 강좌의 폐지가 이들 내란세력의 야만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세 가지 단서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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