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숨쉬고 같이 밥 먹은 가족인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살균제를 썼는데 왜 우리 가족 중 한 명만 피해자로 인정받고 나머지는 등급 외입니까."
전북 익산에 거주하는 변영웅(1966년생)씨는 가족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변씨는 1999년 갓 태어난 딸을 위해 옥시 뉴가습기당번, 롯데마트 PB제품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10년 넘게 같은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고, 아내와 아들, 딸까지 가족 4명 모두 같은 방에서 살균제를 흡입했다. 사용 흔적은 사진과 영수증 등으로 명확히 입증됐다. 하지만 피해 판정은 정반대였다. 딸만 '경미' 판정을 받아 매달 약 15만 원의 약값 보전금을 받고, 변영웅 씨 본인을 포함한 나머지 세 가족은 등급 외 또는 낮은 등급으로 판정돼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발골수종으로 5년간 생사 오가… "폐 외 증상은 아예 보지도 않아"변씨는 2011년 익산 원광대병원에서 다발골수종(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치료는 혹독했다. 5년간 집중 치료를 받으며 입·퇴원을 반복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가 제기한 가장 큰 문제는 판정기관(환경보건센터)이 현재까지도 오로지 폐기능 검사만으로 등급을 판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씨는 "내가 다발골수종으로 죽다 살아났는데, 매년 지정병원에 가면 폐기능 검사만 한다"라며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에는 다양한 질병 모니터링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실은 10년째 폐만 본다"라고 분노했다.
기자가 확인한 2017년 제정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약칭 피해자특별법) 제10조(건강 모니터링)에는 "국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하여 건강 모니터링을 실시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법 시행령 제17조는 모니터링 항목을 정할 때 "폐질환 외에도 피해자가 호소하는 질환 및 건강 이상 소견을 포함할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 즉, 법적으로는 폐 외 질병까지 확인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변영웅씨 사례처럼 현실에서는 지정병원에서 피해자의 폐기능 검사만 한다.
전문가들도 '법적 근거는 충분한데 환경부가 제대로 된 모니터링 체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지난 2022년 5월 13일 박태현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특별법은 피해자가 호소하는 다양한 건강 이상을 확인하도록 허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폐기능 평가에 집중되어 있어 제도 운영취지가 살지 못하고 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변씨는 사용했던 가습기의 사진과 살균제 영수증 등 증거를 정부와 기업에 제출했다. 하지만 정부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전신 증상과 질병을 조사하지 않았고, 피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옥시 등 제조사는 "정부가 혈액암을 피해로 인정하지 않았다"라며 배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변씨는 "정부가 판정하지 않으니 기업은 정부 뒤에 숨는다. 우리 가족은 증거도 있고, 병도 있는데 정부와 기업 모두 책임을 피한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폐 중심' 등급제가 피해 쪼개고 지원 축소피해자 판정 기준인 등급제는 오직 폐CT 소견과 폐 기능지수(FEV1 등)에 따라 등급을 결정하고, 등급에 따라 지원금 규모가 정해진다. 변씨 가족처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기간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더라도 각자 폐에 보이는 손상 정도에 따라 등급이 달라진다. 피해자 단체 관계자는 "결국 등급제는 피해자 한 가족의 고통을 쪼개서 정부 예산을 줄이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 판정은 환경부와 환경산업기술원 산하 판정위원회가 운영하는 등급제에 따라 결정된다. 피해자는 폐질환 여부와 폐기능 지표(예: FVC 등)를 중심으로 1~4단계로 나뉜다.
- 1단계(중증)
폐섬유화가 심각하거나 폐기능 저하(FVC 50% 미만)가 명확한 경우
지원: 연간 최대 300만 원 의료비, 월 20~30만 원 간병·생계비
- 2단계(중등도)
폐 섬유화 소견은 있으나 기능장애는 상대적으로 경미(FVC 50~80%)
지원: 연간 최대 150만 원 의료비, 월 10~15만 원 생계비
- 3단계(경미)
폐렴 증상만 남아있거나 폐 섬유화가 없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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