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암살범' 안두희 격살... 버스기사 박기서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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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의 자유와 바꾼 행동, 독립투사의 마음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를 격살한 박기서씨의 죽음에 대해 기자의 지인이 지난 11일 밤 남긴 말이다.

일부에서 "박기서씨의 정의봉이 세운 정의는 무엇이었냐. 안두희 같은 말단의 촉수들을 때려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라고 조롱할 때 수많은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아쉬워하고 있다.

실제 기자는 지난 11일 밤, 그의 빈소가 마련된 부천장례식장을 찾았을 때 밤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시민들의 걸음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그중에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있었다. 그는 조용히 빈소를 방문해 박씨의 영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추 의원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님의 명복을 빈다"며 자신의 SNS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독립된 나라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을 암살해 역사를 더럽힌 자를 스스로 역사의 청소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단했던 의인이 돌아가셨다. 역사의 정의와 민족의 정기를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오."

박기서를 기억하려는 이유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변호인으로도 알려진 김광민 변호사 역시 박 선생이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빈소를 지난 10일 찾았다. 그는 박 선생에 대해 "영웅이었다"며 아래와 같은 소회를 남겼다.

"중3 때로 기억한다. 내가 다니던 성당 신부님은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이었다. 어느 날 누군가 백범 선생님의 살인자 안두희를 처단했다고 했다. 그리고는 우리 성당에 찾아와 고해성사를 드렸다고 했다. 그가 박기서씨다. 어떠한 폭력도, 더욱이 사적 복수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다만 국가가 역사를 바로 잡았다면 박기서씨가 안두희를 죽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는 국가가 못한 역사를 바로잡았다. 그가 멋있었고, 그에게 고해성사를 준 이준희 마르코 신부님도 멋있었다."

김 변호사는 "아마 그때 그 사건, 박기서씨의 용기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의 위엄이 저를 변호사의 길로 이끌어 주었을 지도 모른다"라고 덧붙였다.

1948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박씨는 경기 부천에서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던 1996년 10월 23일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찾아가 약 40cm 크기의 몽둥이로 살해했다.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는 세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박씨는 결행 후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백범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죽임으로써 역사가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박씨가 살인 혐의로 재판받는 과정에서 각계의 구명운동이 이어졌다.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가 꾸려져 9200여명이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3년형으로 감경돼 형이 확정됐다. 이어 1998년 3.1절 때 사면 대상자에 포함돼 복역 1년 5개월 만에 출소했다. 이후 박씨는 택시운전 등으로 생업을 이어오며 역사왜곡 움직임에 꾸준히 행동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그는 정의봉을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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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인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를 살해한 인물이다.

1917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토지측량기사로 큰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해방 후 재산을 몰수당했고, 그는 가족들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7년 서울에 정착한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에 들어갔고, 이를 바탕으로 미군 방첩대 정보요원으로도 활약했다. 안두희는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해 3개월 교육을 받은 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 4월, 안두희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 당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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