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51세에 안정된 직장 나온 남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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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박주동(60)은 1991년에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 입사해 2016년에 퇴사했다. 정년을 십 년이나 남긴 51세에 퇴사를 결심했을 때,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고 한다. 그는 왜 잘 다니던 안정적인 직장에서 서둘러 퇴직을 했을까?

"월급 제대로 받고, 고용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25년 동안 편하게 살았잖아요. 물론 노동조합 활동도 하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요. 저와 같이 노조 활동 했던 사람들 중에 아파서 죽은 사람도 있고, 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고, 활동에 온몸을 던지며 직장을 떠난 사람도 있었죠. 항상 부채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만둔 거예요."

1991년도에 한국관세무역개발원에 입사한 박주동은 입사 2년 만에 노동조합위원장이 되어 10년 동안 일했다. 당시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생기기 전이라 회사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 소속된 사업장이었다. 민주노총이 출범하기 전인 1993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라는 법 외 단체가 있었다. 한국관세무역개발원 노동조합은 전노협이 출범하자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전노협에 가입했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면서 가장 성과가 컸던 것은 기능직으로 입사한 여성 직원들을 일반직으로 전환한 것이었어요. 여성 직원은 기능 4종으로 입사하면 퇴직할 때도 기능4종으로 퇴직하거든요. 남성 직원들이 처음 입사 시 부여받던 일반직 6급보다 급여가 적었어요. 당시에는 우리 사업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남녀차별이 심했어요. 제가 노조위원장을 두 번째로 할 때 요구했던 게 "직장 내 성 차별을 없애"라는 거였어요. 3년 정도 싸웠어요. 결국 사측과 교섭을 잘해서 기능직을 다 폐지했어요. 여성 직원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노조위원장으로 10년, 그 앞에 놓인 보람과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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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동은 2007년 12월 13일 오후 2시에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외딴 산기슭에 읍장, 이장, 마을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관세무역개발원 노동조합 수련원 개원식을 한다. 수련원은 강의실, 관리동, 가족동, 식당 등 4개 동의 건물로 직원들의 휴양 및 워크숍 장소는 물론, 지역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개방한다. 도·농간 상생의 장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으로 연간 이용객 1만명을 목표로 했다. 수련원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파업이다 투쟁이다 하면서 노조가 조합원들을 끊임없이 동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해주는 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질렀습니다. 조합원들의 휴양복지 차원에서 추진했죠. 저지르지 않고는 못합니다."(2010년 9월 15일자, <금속노동자> 신문에서 발췌)

매년 1500명이 가은 수련원을 이용했다. 그 중 1000명이 관세노조 조합원 및 가족들이었다. 또한 수련원은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나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교육을 할 때나 수련회를 위해 무료로 시설을 제공했다. 일종의 연대사업인 셈이다.

10년 동안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고 뒤돌아 보니 의외로 성과와 보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건 아니다. 조직이 주는 안정감이 없으니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은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본인의 선택을 믿었다.

'남동리 이장'으로 불린 박주동

박주동은 안동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왔다. 어린시절의 그는 '반공소년'이었다.

"안동댐 준공식을 할 때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온다고 학교에서 청소를 시켰어요. 어린 마음에 대통령 할아버지가 온다고 하니까 청소를 열심히 했죠. 종이로 꽃도 만들고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휙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실망이 컸어요. 그때부터 박정희를 싫어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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