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8월에 발생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민심이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김홍집 내각은 그해 11월 15일 건양(建陽) 원년 1월 1일자로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변경하고, 동시에 조칙 2호로 전국에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역법은 그렇다치고 단발령은 유교 전통에서 살아온 조선인에게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미우라 주한일본공사의 지휘 아래 명성황후가 경찰, 군인, 낭인, 친일한국인 등의 혼성부대에 의해 칼에 맞아 숨졌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황후를 죽인 일본인들은 시신을 우물에 던졌다가 다시 꺼내어 불태웠다. 이런 참극으로 온 백성이 분노하는 속에서 국왕 이하 정부 대신들이 앞장 서 머리를 깎고 전국적으로 단발이 강행되었다.
고종은 단발령 선포와 함께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면서 "짐이 발(髮)을 단하여 신민에게 고하노니, 백성들은 짐의 뜻을 극체하여 만국으로 병립하는 대업을 이루게 하라"고 선포하고, 태자와 당일로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등청하였다. 대신들도 뒤를 따랐다. 정부는 단발의 이유로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배경은 딴 데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자 김홍집 내각을 통해 개화의 구실로 단발령 시행을 강요한 것이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오랜 유교 윤리에서 머리를 길러 상투를 트는 것이 인륜의 기본인 효(孝) 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신체와 머리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므로 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근본이란 생각이었다. "'두가단 발부단(頭可斷髮不斷)' 즉 머리가 잘리더라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라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유교적 가치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려는 단발령이 쉽게 먹혀들 리 없었다. 그것도 일본의 강요에 따른 조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크게 격화되었다. 배일 감정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전국의 유림을 중심으로 재야 선비·유생과 평민들까지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 반대를 외치면서 각지에서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단발령은 의병 봉기의 촉진제가 되었다.
당시 내부대신으로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정부의 개혁작업을 지휘하던 유길준은 단발을 거부하는 유림의 거두 면암 최익현을 잡아가두고 단발을 강요했다. 유림들의 단발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수장격인 최익현의 단발이 중요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 단발령에 복종하는 것은 곧 불효(不孝)의 대죄를 짓는 것이며, 동시에 왜(倭)에 순종하는 굴욕이었다. 불시의 단발령으로 장안의 인심은 흉흉해졌으며, 도처에서 곡성이 진동하는가하면 서울에 왔던 지방인들은 머리를 감싸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바빴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자극되었던 배일 감정이 단발령으로 폭발하여 은퇴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金炳始)를 비롯하여 많은 선비들이 반대상소를 올렸으며, 전국의 유생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완강하게 저항하고 나섰다.
유학자 송병선(宋秉璿)은 책을 안고 천마산으로 들어가면서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라고 일갈(一喝) 하였고, 기우만(奇宇萬)은 "나라는 망하지 않는 법이 없으니 머리를 깎이고 나라를 지키기보다는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다가 망하는 편이 낫다."면서 상소를 올려 비분을 토로하였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단발의 이로움은 없고 해로움만 보이기 때문에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 대신직을 사임하였다. 또한 유생 이진상(李震相)은 <의제론(衣制論)>을 지어 그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이 같은 유학자들의 항거와 의병 활동에 대해 정부에서는 친위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배일 기세는 더욱 심해졌다. 얼마 뒤에 김홍집은 결국 피살되고 친일 내각은 무너지게 되었다.
단발을 거부한 면암 최익현의 구속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안에서는 온건론과 강경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유림을 대표하는 면암을 구속할 경우에 나타날 상황이 내다보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힘은 이미 일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강경론이 채택되었다.
면암은 거듭되는 조정의 단발 요구에 "내 목은 자를 지언정 내 뜻만은 빼앗을 수 없다."고 오연하게 버텼다. 면암으로 대표되는 유림과 사대부, 평민들까지 일반적으로 국모시해와 단발령은 주체만 일본과 조정으로 다를 뿐 반역과 부도(不道)에는 마찬가지라는 인식이었다.
이들은 어떤 경우라도 국모를 살해한 일본에는 개항을 할 수 없으며, 목을 자를 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발은 전국적으로 강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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