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말고, 이젠 '선배시민'이라고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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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해고로 공군자씨는 공무원에서 활동가로 신분이 바뀌었다. 2004년 출범한 노동단체인 서울노동광장에서 상근을 하면서 노동운동사, 노동인권, 조직활동 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뭘 알려주는 게 재미있어서" 선생님이 되고 싶던 어린 시절의 장래희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같이 상근하던 활동가들은 교육 전에 체할까봐 밥을 안 먹더라고요. 저는 배고프면 말을 못한다고 첫 강의 전에도 짜장면 한 그릇 먹고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넌 '교육이 체질'이라고 말했죠."

활동을 하면 할수록 "내가 교육 하고 조직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특히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은 그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 고마운 존재였다. 스스로가 권위적이란 깨우침을 얻기도 했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 이면에는 '내가 옳아. 우리만 옳아'라는 전제 하에 다른 사람들한테 그 생각을 강요하고 가르치려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인권은 일방이 없고 쌍방"이라는 사실부터 새롭게 배웠다. 교육을 하러 가서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참여자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임을 매순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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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청소년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으니까 내가 뭔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청소년노동인권교육을 접하고부터는 나이나 경험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그 뒤로는 청소년, 1차로는 우리집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뀌었어요."

'아이들의 삶은 아이들의 것이니 내가 강제하면 안 된다'는 양육관을 세울 수 있었다. 덕분에 두 아이는 초중고 내내 "공부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즐겁게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독립심과 자립심이 강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는 "내가 그들 인생에 대해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까 본인들이 알아서 자기 계획을 세우더라"며 웃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필요한 물건을 골라놓으면 그가 주문을 했다. 학원도 아이들이 보내달라고 하면 가서 결제만 해서 학원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컸던 건 딸이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다. 그는 조언했다.

"자퇴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여전히 존재해. 네가 그걸 어떻게 극복해갈지 먼저 자퇴해본 선배나 학교 선생님들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고 결정하렴."

딸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나눴고, "더 이상의 학교생활은 별 의미가 없어. 엄마, 나 자퇴할래"라고 결론을 알려왔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왜 말리지 않느냐고 노발대발 하는 함께 사는 시부모님과 남편을 설득했다.

"싫다는 애를 강제로 다니게 해봐야 학교 가서 잠만 자요. 그렇게 시간만 버리는 것보다 그 시간에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게 요즘 애들한테는 훨씬 좋아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친구 관계도 잘 맺어온 딸을 알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결국 딸은 고등학교를 그만뒀고, 진로를 모색한 끝에 3년 후 미대생이 되었다. 둘째가 고등학생이 되자 그가 물었다. "너도 자퇴할 거니?" 아들이 답했다. "아니야, 엄마. 내 적성에는 학교 다니는 게 맞아." 그 말에 "그래, 그럼 잘 다녀." 한 마디 하는 걸로 아들의 학교생활 참견을 마쳤다.

부부 사이도 상당히 독립적이다. 그는 여러 활동을 하느라 주말도 없이 하루를 쪼개 쓰며 살고, 남편은 노무사인 직업이 부업처럼 느껴질 정도로 산악인에 가깝게 산다. 지금은 체력에 부쳐 자제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한두 번씩 해발 8000미터가 넘는 산들을 등정했다. 국내 산은 여전히 주말마다 오른다. 암벽등반도 하고 겨울이면 산악스키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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