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거의 최면상태... 반도체특별법이라는 위험한 베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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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지금 '반도체'와 'AI'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거의 최면 상태에 빠졌다. 정부는 반도체특별법을 국가경제의 생존과 직결된 법인 것처럼 주장하고,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반도체·AI는 국가 미래의 핵심"이라는 주문을 반복한다. 최근 삼성전자는 이러한 분위기에 정확히 맞물려 "향후 5년간 국내 450조 투자"를 발표하며 정부 전략에 힘을 싣는 듯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극적인 숫자들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 산업정책의 부재, 자원·에너지의 한계, 노동 구조의 취약성, 지역경제의 종속 문제라는 현실을 가리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한국이 처한 조건을 냉정하게 분석한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기술주의적 낙관론과 재벌 중심 산업정책이 만난 결과물에 가깝다.

지금 한국은 '첨단산업이 미래를 연다'는 믿음 아래, 반도체와 AI를 거의 성역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성찰은 사라졌다. 반도체특별법에 대한 논쟁은 단순히 산업정책, 노동정책의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가 기술·자본·국가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직결되어 있다.

기술·시장 변동성 앞에서 30년짜리 계획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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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2047년까지 622조 원, 삼성전자는 2052년까지 360조 원 등 장기 계획을 앞세우며 '세계 최대 반도체 메가클러스터'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AI 데이터센터 역시 2030년 이후까지 다수의 인프라 투자를 이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반도체와 AI라는 두 산업 자체가 30년을 장담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도체 공정은 1~2년 단위로 재편된다. 5나노·3나노·2나노 등 초미세 공정 경쟁은 시간 단위로 기술경쟁이 벌어진다. 시장 판도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 AI는 말할 것도 없다. 반년마다 기술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지난해의 기술이 올해 바로 구형이 되는 산업이다. 이런 산업을 향해 정부가 30년짜리 장기 계획을 내놓는 것은 정책의 안정성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시장에 대한 위험한 베팅이다.

이 속에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 전략은 지속적인 생산능력 증대에 있어 과잉생산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반도체 시장의 근본적 불안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6년 연속 세계 1위의 설비투자액을 기록했고, SK하이닉스도 글로벌 4~5위권이다. 여기에 반도체 메가클러스터, 용인반도체 국가산단 설치 등 주로 설비와 생산능력 증대에 꽂혀 있다. 미국 등 해외 공장 증설까지 포함한다면, 반도체 생산능력과 시장 점유율은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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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국내 생산능력은 세계 수요의 21.9%(2028년 기준)에 달할 전망이지만, 국내 수요는 5.4%(2026년 기준)에 불과해 생산의 상당량을 해외에 팔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유럽, 일본 등 주요 경쟁국의 '수입대체 산업화'(Import 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로 각국별 국내 생산을 확대해 나갈 뿐만 아니라, 공급망 재편·시장 봉쇄로 판로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반도체를 팔 곳도, 살 곳도 줄어드는 때에 이런 방식의 반도체 생산능력 증대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최악의 경우 반도체 산업이 그대로 자멸할 가능성도 있다.

판로와 수요가 축소하는 상황에서 생산 증설을 위한 과잉투자는 실제 시장 상황과의 괴리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 2018년 830억 달러에 달했던 반도체 수출이 2023년에는 429억 달러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AI 산업 역시 GPU 기반 대규모 연산 인프라 경쟁이 과열되며 이미 비용 부담이 폭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반도체와 AI 두 산업에 대한 생산능력 확대 방식을 동일하게 답습하고 있다. 생산능력만 키우면 미래가 열린다는 단순한 믿음, 이것이 바로 지금의 산업 정책을 떠받치는 위험한 신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삼성전자가 "향후 5년간 국내에 450조 투자"를 선언하는 것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반도체특별법과 각종 규제 완화, 세제 혜택, 전력·용수·입지 지원을 관철시키기 위한 협상 카드이자 정치적 메시지이기도 하다. 투자 계획은 언제든 조정될 수 있지만, 한 번 깔린 인프라와 지역의 의존 구조는 쉽게 되돌릴 수 없다.

이처럼 30년 장기 투자계획은 시장 급변에 취약하다. 투자계획이 철회될 경우, 대규모 산단과 인프라는 산업 공동화와 지역경제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 신공장 건설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2025년 파운드리(위탁생산) 설비투자를 전년 대비 절반으로 줄였다. 이는 수주 부진과 첨단 공정 지연 등 시장 상황 변화에 따라 대기업의 투자계획이 언제든 축소·철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삼성전자가 다시 투자 계획을 확대하고 중단된 신공장 건설을 재개한다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다시 생산 조건과 상황이 변하게 된다면, 거대한 산단과 인프라는 산업 공동화와 지역경제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반도체·AI에 올인한 한국경제의 침몰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도체 지원 30년 투자계획 속에서 발생할 수요변동, 산업변동, 투자계획 변동은 한국경제 전반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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