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 임실의 섬진강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순국한 의병이 있다. 그러나 임실의 호국 보훈 시설 묘역인 소충사에 그 의병의 이름은 없었다. 박갑쇠 의병, 그의 자리는 왜 아직 비어 있는가?
임실 성수면 오봉리 산 130-1번지 일원에 조성된 소충사(昭忠祠)는 구한말 이석용 의병장과 순국한 28인의 의병이 배향된 사우(祠宇) 겸 묘역이다. 소충사는 이성용 의병부대의 순국한 의병들을 기리는 보훈 시설이며 기념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그런데 이석용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의롭게 순국한 이분이 임실 소충사의 배향에서 제외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박갑쇠 의병을 비롯하여 이름 없이 산화한 의병이 있다면, 그분들을 찾아내서 임실 소충사에 추가 배향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박갑쇠(박삼봉, 1887~1910). 임실 성수산 권역을 중심으로 항일 전투를 전개한 이석용 의병부대에 지휘관 박갑쇠 의병이 있었다. 그는 임실읍 성가리 출신이었다. 1907년 9월,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항일 투쟁을 시작할 때부터 박갑쇠 의병은 이석용 의병부대의 핵심 지휘자로 선봉에 섰었다. (이석용 의병장의 <호남창의일록(湖南倡義日錄)> 기록)
박갑쇠 의병은 1908년 9월 임실경찰서(헌병주재소)를 기습해 전북 동부 항일전선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10년에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압송되던 그는 "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죽겠다."라고 말하며 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고 기록되었다. (대한민국 공훈전자사료관, '박갑쇠' 공훈 기록)
박갑쇠 의병의 손자인 임실군 광복회 박양현 회장이 조부의 행적을 증언하였다. 박양현 회장은 조부가 임실 신평면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조부가 몸을 던져 순국한 강이 '임실 신평면 원천 대티보의 섬진강'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일본 헌병이 조부님을 신문하며 이석용 의병부대의 무기 은닉 장소를 대라고 다그쳤대요. 조부님은 그들에게 안내하겠다며 섬진강 대티보로 유인하였답니다. 섬진강 물살이 깊은 장소에 이르자, 조부님은 하늘을 우러러 천천히 말했다고 해요. "대한 의병의 이름은 죽어도 더럽힐 수 없다." 조부님은 좌우에서 팔을 붙잡고 있는 일본 헌병을 뿌리치고, 깊은 강물로 뛰어들어 순절하셨다고 합니다.
박갑쇠 의병은 정미의병의 존엄을 지켜낸 당당한 대한 의병이었다. 섬진강의 대티보 물살 위로 햇빛에 출렁이는 금빛 윤슬이 의병이 바라본 마지막 조국 대한의 풍경이었다.
기자는 지난 30일, 임실 신평면 가덕리 앞의 섬진강 대치보 위치를 찾아가 보았다. 1980년대 <임실군지>의 지명 자료에 '대티보, 대티봇들, 대티쏘'의 지명이 나온다. 늦가을 아침 섬진강에는 안개가 자욱하였다. 100년 전의 지형은 찾을 수 없었지만, 섬진강 아침 안개는 의병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듯했다.
지난달 12일, 임실 삼봉산 기슭에서 의병의 길을 역사 문화 탐방하며 걸었다. 이때 임실 의병 활동의 역사를 찾아 여러 자료를 살피다가, 이석용 의병부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한 한 의병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관련 기사: '의병의 길'을 걸을 땐 비석 속 이름들을 찾아보세요)
가시밭길을 걸었던 의병들의 호국 행렬
1907~08년 정미의병 시기에 활동한 임실 성수산을 중심으로 삼봉산, 고덕산과 진안 내동산으로 이어진 임실 성수산 권역의 산줄기 일대는 의병부대가 빈번히 이동하며 지휘, 은신과 전투를 이어간 중심 지역이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 계절인 11월 마지막 날, 임실 성수산, 삼봉산, 고덕산과 진안 내동산 기슭을 차례로 찾아가 보았다. 임실 이석용 의병부대의 중심 활동 지역에서 그들의 가시밭길 의병활동 여정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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