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 적당히 있어도 되는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12·3 내란 사태를 접하고 비로소 '예' 아니면 '아니오'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왔잖아요. 그 내란의 밤에 제일 먼저 떠올랐던 건 옛날 순교자들, 군사정권에 끌려가 고문당했던 선배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 '이 분들은 하루하루가 선택하는 삶이었겠구나, 선택을 한다는 건 또 다른 걸 포기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내란 당시 저는 이미 피정 중이었는데, 그때는 피정 속의 피정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었어요."
내란 후 1년, 김용태 신부(마태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는 1년 전을 이렇게 떠올렸다.
국회가 가까스로 계엄을 해제했지만 윤석열이 여전히 대통령이던 지난해 12월 9일,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대전 중구 대흥동 성당에서 1000여 명의 신자들과 시국미사를 열었다. 그날 김 신부는 윤석열이 일으킨 내란을 요한 묵시록에 빗대 설명했다.
김 신부는 하느님이 용과 싸우는 대목을 소개하면서 "악마라고도, 사탄이라고 하는 자가 땅에 떨어졌다. 그의 부하들도 함께 떨어졌다. 사악한 용이 자리 잡은 그곳을 우리는 용산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또 "악마라고도,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가 12월 3일 밤에 지X발광하였다"며 "대명천지에 비상계엄이라니... 이는 친위쿠데타, 국민을 향한 반란이었다"고도 했다.
이날 시국미사는 빈 공간에 간이 의자까지 꺼내놓을 정도로 붐볐고, 참석 사제만 100여 명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김 신부의 시국미사 강론은 추운 한겨울 밤 돌발적인 비상계엄 선포로 두려움에 떨던 신자들을 크게 위로했다. 특히 시국미사가 열린 대흥동 성당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반독재 목소리를 내온 주교좌 성당으로 그 의미를 더했다.
(관련 기사 : "윤석열 탄핵하고, 검찰개혁까지 해야 한다" https://omn.kr/2bd44)김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성인(안드레아)의 후손(4대손)으로 가족 중에 14명의 순교자가 있는 천주교 성인공파다. 그는 현재 도마동 성당 주임신부로 대전교구 사회복음화국장이자 정의평화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평소에도 세월호 참사 추모 미사, 대전 골령골 평화 미사 등 정의와 평화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해왔다.
김 신부는 지난 11월 28일 오후 경기 용인시 영보 피정의 집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더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뭔가를 걸어야 했다"며 "적당히 무관심하고 중간쯤에 있으면 내 한 목숨은 보존하겠으나 그러자면 너무 소중한 걸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대한민국에 와 있다면 아마 이 시대를 (지난해 시국미사에서의 제 말처럼) 표현하지 않았을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피정 중 마주한 계엄의 밤, 그날 걸려온 전화 한 통우연하게도 김 신부는 지난해 12월 3일 수원 피정의 집에 있었고, 1년 후 인터뷰 시점에도 용인 피정의 집에 머물고 있다. 피정은 세속을 피해 고요하게 머물며 기도하는 활동을 말한다.
지난해 12월 3일 오후 10시 33분 계엄의 밤, 김 신부는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 신부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형님, 지금 비상계엄이랍니다"라는 문자를 보고 김 신부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그 신부가 농담도 잘 하고 술 먹으면 항상 전화하고 그래요. 또 술 먹다가 농담하는구나 싶어서 술이나 마저 먹으라고 했는데 진짜래요. 빨리 뉴스를 보라고."
김 신부는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 든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대통령이 계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저러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속상함이 치고 올라왔다. 그는 "한국이 오랜 시간 군부 독재를 겪고 난 뒤에 세계 속에서 자랑스러운 이미지를 만드는 경지까지 올라갔는데 하루아침에 이걸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다음날 피정 중 마지막 미사를 앞두고 신학생인 부제품 대상자들에게 전할 말을 준비하고 있던 김 신부는 결국 그날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꼬박 밤을 새며 뉴스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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