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 헌법이 모호하다

귀족, 평민. 타고난 혈통을 준거로 특정 집단에 배타적 권력을 부여하던 신분제도는 시민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근대는 혈통, 성별 등 배경과 관계없이 법 앞에 동등한 지위를 지닌 주체 즉 '시민'을 탄생시켰다. 시민의 출현으로 신분제도 하에서 사회적 질서로 견고하던 특권은 해체되고, 시민이라는 등등한 지위에 결부된 평등한 권리, 시민권으로 대체되었다.

한 국가의 시민이 갖는 권리가 무엇인지는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다. 헌법은 시민의 지위에 배태된 권리를 확인하고, 국가를 권리 보장의 당사자로 호명하는 근거가 된다. 헌법 제34조는 시민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 그리고 국가는 이를 위해 사회보장 및 사회복지 증진에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정하고 있다.

여자, 노인, 청소년의 복지와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장애인 및 생활 능력이 없는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국가에 있음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시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국가가 증진해야 할 사회보장과 사회복지의 내용은 구체화하지 않은 채 모호한 상태로 열어두고 있다.

새로운 사회적 위험,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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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 및 사회복지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의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이다. 질병, 실업, 장애, 노령 등 소득 불안정성을 높이는 구조적 위험을 집합적으로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가 출현했다. 이는 헌법에 명시된 사회보장의 내용과 범위는 시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이 무엇인가에 의해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5년 1분기 기준 0.82명의 초저출산율로 상징되는 한국의 재생산 위기는 집합적 대응을 요구하는 사회적 위험이 돌봄을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사회·경제적 기회가 제한될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출산과 양육을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사회에서 돌봄을 책임져야 할 대상을 만들지 않는 것은 강요된 선택이다. 그러나 돌봄이 주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특히 코로나19를 계기로 돌봄의 실존적 절대성이 인지적으로 각성되었음에도 돌봄 정책의 의미 있는 개선은 여전히 미흡하다.

한편, 재생산 위기의 뿌리는 생산과 재생산, 남성 역할과 여성 역할을 구분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분할로부터 찾을 수 있다. 생산은 공적인 영역에서 주로 남성에 의해 수행되고 경제적 보상이 따르는 노동인 반면 재생산은 사적인 영역에서 주로 여성에 의해 무급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으로 이원화되었다.

그런데 경제구조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으로 이동하는 탈산업사회의 특성상 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성이 증가하면서 남성 부양자의 임금에 의존해 가족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더불어 탈산업화는 여성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확대하고 여성의 고용 경쟁력 또한 증가하면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증가했다.

이와 같이 여성의 생애주기는 빠르게 남성화되는 반면 남성 생애주기의 전환은 지체되면서 재생산 노동의 토대가 위축되었다. 특히 돌봄의 필요도가 높은 후기 노인을 중심으로 인구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돌봄에 대한 사회적 욕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돌봄의 수요를 가족이 감당하지 못하면서 돌봄 위험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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