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12월 3일은 어땠습니까?"
지난 1년 동안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겐 꼭 한 번씩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날을 빼고서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요. 만약에 12월 3일의 시나리오가 '비상계엄 성공'으로 흘러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한 상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정훈님은 그날 어디에 계셨는지요? 당시 저는 일본 교토 여행 중이었습니다. 단풍으로 유명한 청수사를 방문한 후,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녹인 뒤에 쉬고 있던 터였죠. 윤석열이 긴급 담화를 한다길래 "설마 하야 선언하나" 아내와 농담을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오후 10시 23분, 돌연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윤석열의 말을 듣고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내일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한국으로 갈 수는 있는 건가, 회사(<오마이뉴스>)는 괜찮은 건가.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국회로 모여드는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을 보며 마음을 졸이다가,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 가결됐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날 여행에서 교토 인근 오하라의 사찰 '산젠인'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음에도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비상계엄은 내 터전과 내 일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이었으니까요. 허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 와중에 발에 급격한 통증이 생겨서, 나중에는 거의 걷기도 힘들 정도가 되더군요.
몸과 정신이 모두 고장 난 상태에서, 12월 7일 여의도 탄핵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비록 발은 아팠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봉과 케이팝 합창을 보고 나니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록 이날 국민의힘 의원들의 불참으로 탄핵소추안 표결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왠지 절대 지지 않을 것 같더군요.
내란을 정쟁화한 입법·행정·사법부비상계엄의 위헌·위법은 너무나 명확하기에, 일찌감치 끝날 것 같던 탄핵 국면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그동안 윤석열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고 관저에서 버티는가 하면, 서울중앙지법 지귀연 판사가 초유의 '시간 계산법'을 통해 윤석열 구속을 취소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헌법재판소 탄핵 선고일은 당초 예상보다 한참 미뤄져서 시민들의 애간장을 타게 했습니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도 대법원은 당시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돌연 '유죄 취지 파기환송'을 하면서 '선거 개입'에 가까운 행태를 보입니다. 그러니 '내란이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이 계속 나올 수밖에요.
내란 사태에서 유독 기억에 남은 세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내란을 결코 윤석열의 단독범행처럼 여기면 안 된다는 증거들이었습니다. 부도덕한 엘리트의 존재가, 법조 카르텔이,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이 내란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었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만들더군요. 내란을 두둔하고, 내란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했던 이같은 일들은 12.3 내란으로부터 1년이 지났음에도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 계엄 직후인 2024년 12월 3일 10시 49분, 용산 대통령실 대접견실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나가려는 이상민 장관을 붙잡았다. 둘은 16분 동안 서로의 문건을 보며 협의를 했고, 이 장관은 한 총리를 보며 '씨익' 웃기도 했다. (내란 특검이 공개한 대통령실 CCTV 중)
# 1월 6일 오전 6시께, 국민의힘 의원 30여 명이 용산 대통령 관저 앞으로 모여들었다. 공수처가 법원에서 발부받은 윤석열 체포영장의 만료일, 영장 집행을 막고자 '인간방패'를 자처하며 집결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모인 국민의힘 의원은 모두 45명. 김기현 의원은 이날 "사기 탄핵이 진행되지 않게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싸워나가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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