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최근 봤던, 모 공익광고 속 열 살 소년의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깡통을 수집하며 할머니를 돕는 그 아이는 영재학교에 갈 만한 재능이 있지만, 눈앞의 막막한 가난 때문에 그 꿈을 미루고 생계를 선택한다. 불평 대신 혼자 서점에서 수학 문제집을 눈으로 풀어보고 집에와 외워온 문제를 응용해 자신만의 문제집을 만들어 공부하는 아이. 가족을 돌보는 책임감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이미 어른스러운 선택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김나연 작가가 쓴 <가난의 명세서> 역시 자신의 지난 경험을 통해 가난이 한 사람의 자아를 어떻게 잠식하는지 보여준다. 가난 때문에 현재를 버텨내기에 급급하다. 작가는 '가난이 심리와 정체성에 남기는 흔적'을 책을 통해 모두와 이야기하고자 했고, 이는 인터뷰를 요청한 이유이기도 했다.
김 작가는 지난 11월 19, 20일 양일간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가난이 한 개인의 자아와 정체성을 어떻게 위축시키고 잠식하는지, 그럼에도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어떻게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고백했다.
'작업용 노트북 6만 1900원', '엄마 병원비 7만 3319원'가난, 즉 경제적 곤궁은 물질의 영역을 넘어 그의 정서까지 침범했다.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던 환경 속에서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낙찰 후 받은 돈은 몽땅 월세 보증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돈은 모을 수 없었다. 친척이나 지인 등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자니 이들도 넉넉지 않았던 건 마찬가지. 그럴수록 그는 허리를 바짝 조였고, 꼭 성공하리라는 각오로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다. 그렇게 주경야독으로 겨우 1년치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꼬박 3년이 걸렸다.
그 무렵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3년여 모은 돈을 간병비와 수술비로 썼다. 간병비라도 일부 아낄 요량으로 직접 간병에 나섰지만, 반대로 생활비를 벌 수 없었다. 그는 "진짜 가난임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죄가 아님에도 소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주변에서 '이런 상황 속에서 무슨 대학원을?'이라며 눈치를 주는 듯했다.
할 수 없이 제1금융권에서 이율 5%의 신용대출로 400만 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가계부채를 늘리는 것이어서 죄스럽고 눈치 보였다"며 "하루하루가 가난과 부채와의 싸움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작업용 노트북 6만 1900원', '엄마 병원비 7만 3319원'... 이 책의 목차 중 일부다. 지난 10여 년간의 생생한 지출 기록을 나열하고, 모든 지출을 문서화해 소비 목록 하나하나를 다시 톺아보고자 의도한 것. 그러나 '소비 목록'은 작가의 바람과는 달리 '가난의 명세서'가 돼 버렸다.
좀 더 써야 했던 곳주중에는 '테크니컬 라이터'로, 그 외 시간에는 '번역가와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가난의 명세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문득 '돈이 없다는 건 왜 이렇게 괴로운 일일까, 이 궁핍이 가난인가, 내가 가난하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라는 고민 속에서 펜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또 "계산대 앞에 설 때마다 해당 금액을 수십 번씩 암산으로 계산하고 필요한 만큼 지출하는데도 남는 게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가난한 상태에서의 지출은 죄책감마저 들게 했다"면서 "경제력이 생긴 후에는 (지출이) 당당할 줄 알았는데, 늘 마음 속에 습관처럼 얹혀 있는 여러 소비 부담은 가시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 죄책감을 덜고, 필요한 지출만 하는 방법을 찾았을까.
"솔직히 아직도 '길트 프리(Guilt-Free, 상품 구매 시 환경파괴나 비윤리적 생산 과정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소비'를 못 해요. 또, 가격을 떠나 물건 하나를 사도 며칠 더 고민하거나 실제 매장에 한 번 더 가서 확인하고, 반품 기한을 확인하는 일도 잦아요. 필요와 충동에 따른 소비 판단이 쉽지 않고요. 소비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런 것 같아요."
모바일 쇼핑 구독 서비스도 늘면서, 무기한 반품 등 소비는 더 편리하고 빨라졌지만 그만큼 지출 항목이 늘기도 한다. 때문에 그는 사고 싶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며칠 묵혀두고, 사나흘 뒤에도 눈에 아른거릴 때만 구매하는 '구매 지연 훈련'을 한다. 대부분의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그는 이를 통해 '느린 소비'를 지향하려 애쓴다.
또 "단순히 절약만 하기보다 '사용 빈도'를 먼저 확인하고, 이것으로 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가 판단한다"고 했다. 가까이 두고 자주 사용하는 물건일수록 만족감과 사용감을 고려해 신중하게 구매한다. "오래 고민해 하나를 사는 것이 결국 절약이자 충동 구매를 자제하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그 시절의 경험이 기억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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