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모처럼 움직이고 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친서를 전달하고, 고 이희호 여사에 조전을 전달하는 등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얼어붙었던 북·미 라인과 남북 라인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북·미 라인에는 적극적, 남북 라인에는 신중한 행보를 보이면서 북한의 ‘통미봉남’ 전략이 재확인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위원장의 친서외교는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을 향한 분명한 청신호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13일 “트럼프 대통령을 대상으로 북한이 3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이라며 “6월 말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북한의 태도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하지만 북한이 이 여사 별세에 조문단이 아닌 조전과 조화로 조의를 전달한 것은 G20 직후 열릴 한·미 정상회담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려는 우리 정부 입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북한 매체들은 전날 김 위원장 조의문 전문을 신속히 공개했지만, 현 교착 국면의 책임이 미국에 있으며 남측은 외세가 아닌 민족과 공조해야 한다는 기존 주장도 반복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북남관계 개선과 조선반도의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을 바란다면 북남선언들에 대한 입장과 자세부터 바로 가지고 그 이행 의지를 말이 아닌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이 북·미 대화보다 남북 대화에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은 같은 민족 입장에서 역할을 좀 더 해달라는 표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원곤 교수는 “최근 ‘숙청설’ 등으로 미국 내 대북 정서가 악화된 상황에서 북한이 친서를 보내 북·미 관계를 관리하면서도 남북 관계는 실질적으로 얻을 게 없다는 판단에 따라 미뤄두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미 정상회담 전 원포인트 남북정상회담 성사 여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6·15 공동선언실천남측위는 이날 한반도 정세와 남북 관계에 대한 우려로 북측에서 6·15 평양 공동행사를 거절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이날 기자들을 만나 이 여사 별세를 계기로 남북 만남이 성사되지 않은 데 대해 “만남 자체도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통일부는 전날 판문점에 온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모습을 담은 약 1분40초 분량 영상을 취재진에게 제공하면서 김 부부장 육성을 ‘묵음 처리’해 ‘북한 눈치보기 논란’ 등 뒷말을 낳았다. 한 당국자는 이날 북한 요청 때문은 아니었다고 해명했으나 의사 결정 과정은 밝히지 않았다.◆트럼프 “北과 잘해 갈것”… 네 번이나 “서두르진 않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북한 문제와 관련해 잘될 것이라면서도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1주년인 이날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북한과 매우 잘 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서두를 게 없다. 제재들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를 것 없다”는 말을 네 번(‘in no rush’ 3번, ‘in no hurry’ 1번)이나 강조했다. 여유를 갖고 3차 북·미 정상회담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전날 “대화하지 않은 기간이 길어지면 대화의 열정이 식을 수 있다”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속한 만남을 촉구한다”고 밝힌 것과는 거리가 있다. 또 우리 정부는 정상 간 담판을 통한 ‘톱다운 방식’을 선호하지만 미국은 실무협상을 통한 합의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모건 오테이거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북한과의 실무협상을 이어가고 싶고 준비돼 있다”며 1년 전 북·미 정상이 채택한 싱가포르 성명이 결실을 이루기 위한 실질적 진전이 정상회담 이전에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양국이 북핵 해법을 놓고 시각차를 드러내 공조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그러나 13일 기자들과 만나 “발언 전체의 맥락을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의 만남을 미룬다고 얘기할 수 있겠나”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이야기와 문 대통령의 얘기가 서로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미 간에 결코 이견이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견에서 김 위원장의 친서 내용과 3차 정상회담 추진 여부에 대한 질문에 “그는 매우 멋진 친서를 썼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며 “언젠가는 여러분도 친서 안에 뭐가 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나는 달라질지 모른다. 내가 달라진다면 재빨리 여러분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릴 것”이라며 북한 대응에 따라 미국 기조가 바뀔 수 있음을 시사했다. 김 위원장의 친서와 관련해 미국 CNN방송은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비핵화 대화의 진전과 관련한 세부사항은 담겨 있지 않다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그러나 1차 회담 1주년 직전에 보낸 친서의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미 정부 관리들은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새 카운터파트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고 CNN은 전했다. 비건 특별대표는 1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15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들과 가진 비공개회동에서 김 위원장의 친서와 이희호 여사 별세에 대한 북측의 조의문과 조화 전달을 언급하며 “긍정적인 시그널로 본다”는 취지로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동에선 대북제재 문제도 언급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이날 일부 동맹국과 함께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에 북한의 불법 해상 환적에 대한 문서를 보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북한이 올해 총 79차례의 불법 환적을 통해 정제유 연간 취득 상한인 50만배럴이 넘는 분량을 이미 취득했고 대북제재 결의 2397호 위반에 대한 조치를 요구하는 내용이 문서에 담겼다고 통신은 전했다. 홍주형·박현준 기자, 워싱턴=정재영 특파원 jh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