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의 감성을 '화폭'에…이영지 개인전
푸른 바다에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다.
배에 쪼르르 달린 8개의 전등이 배 안을 비추고 있고,
진분홍색 꽃나무도 한 켠에 있다.
하이얀 부부 새가 마주 보고 있고,
배에는 금은동 메달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바다 위에도 예쁜 형형색색의 나무가 두 그루 떠 있고,
수많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는 검은 밤하늘 위에는
다섯 그루 나무 사이로 금명이, 은명이, 동명이가 새의 모습으로 날아다니고 있다.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감성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의 제목은 '나, 너무 좋아'.
드라마 속 애순(아이유 분)과 관식(박보검 분)이 '금은동호'를 샀을 때의 기쁨을 이영지 작가 특유의 나무 작품과 함께 펼쳐내 눈길을 끈다.
한국화가 이영지 개인전 '인 유어 사일런스'(In Your Silence)가 6월 13일까지 서울 종로구 선화랑(대표 원혜경)에서 열린다.
전시 첫날인 14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 작가는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며 "그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게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주황색 꽃이 만발한 꽃밭 위에 작고 허름한 리어카가 놓여있다.
주황, 노랑, 진분홍 꽃과 하늘색 잎으로
한껏 장식한 그 안엔
하얀 새(애순)이가 들어있다.
나무 위 밤하늘에는 초롱을 문 하이얀 엄마새가
애순이를 비추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항상 네게 닿아있는 내맘'.
극중에서 애순의 어머니(염혜란 분)가 초롱을 들고 밤길을 비추며 애순이를 데리고 가는 장면을 나타냈다. 네가 보이지 않아도 항상 위에서 비춰주고 있다는 애순 어머니의 마음을 표현한 것.
"항상 드라마도 많이 보고 음악도 많이 들어요. 감성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죠."
전시장 안에 가득한 나무 그림, 언뜻보면 동양화 같지 않지만 그 은은하고 편안한 느낌은 한지에 깊이 배여 있는 먹과 채색의 조화 때문인 듯 싶다.
먹으로 나뭇잎 한 장, 한 장을 그리고 다시 채색하고 보기만 해도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원하는 색감을 얻기까지 수많은 밑색 작업과 마른 붓질의 먹 선은 깊이를 더하고, 세밀하게 그려진 나뭇잎과 풀들은 완성도를 높인다. 단순한 자연 풍경을 넘어, 존재와 관계, 시간과 기억이 쌓여 이루어진 내면의 풍경으로 확장된다.
"색깔을 하나하나 올리고 하나하나 그리면서 진짜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죠. 그 때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어요."
"이영지 작가 작품의 힘은 배경입니다."
선화랑 원혜경 대표의 말이다.
처음엔 무수한 나뭇잎의 나무에 눈이 가다 다시 배경을 보았다. 배경에 남아있는 먹 선이 주는 깊이가 작품이 주는 편안함을 더해 준다.
원하는 색이 나오도록 여러 번의 밑 색을 칠한 후 마른 붓질의 먹 선이 공간 위를 넘나든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흐름이 담긴 회벽의 느낌처럼 자리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헤저드에서 용감하게 골프채를 들고 서 있는 하이얀 새.
만발한 꽃밭 위에는 나비 세 마리가 노닐고,
오비난 골프공은 나무 속에도 숨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이제 시작일뿐야'.
골프칠 때의 즐거움을 위트 있게 나타냈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는 전통 채색화 작업을 고수해오며 종이 위에 부드럽게 쌓은 아름다운 색감과 섬세한 필치로 '사랑'이라는 추상적이지만 인간에게 있어 누구나 갈망하는 보편적 정서를 작가만의 개성 가득한 화면으로 풀어놓았다.
최근 홍콩과 아부다비 등 국제 미술시장에서의 반응도 뜨겁다. 전시마다 '완판' 기록을 세우고 있다. 우리 채색화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감수성을 품은 이영지의 작품이 빛을 발하고 있다.
성신여자대학교 동양화과와 같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이 작가는 선화랑에서 2016년 예감전을 시작으로 2018년 '네가 행복하니 내가 행복해', 2021년 '숲속숨쉼씀', 2023년 'Stay with me', 이번 전시까지 네 차례 개인전을 가졌다.
삼성인력개발원과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을 비롯한 다수의 공공기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