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을 칼로 자른다고?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

도마 위에 올려진 유리컵이 부엌칼로 부드럽게 잘린다. 황금빛 꿀로 만들어진 키보드를 누르자 손끝에 묻은 꿀이 길게 늘어지며 특유의 끈적이는 소리를 낸다.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 영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우리의 상상력을 그대로 구현해주는 생성형 AI 덕분이다. 구글의 차세대 생성형 AI 모델 '베오3(Veo3)'는 텍스트로 입력한 장면을 단 몇 분 만에 고화질 영상으로 만들어낸다. 실제로 기자가 "도마 위에 올려진 유리컵을 부엌칼로 자르는 영상을 만들어줘"라고 프롬프트에 입력하자 약 2분 뒤 텍스트를 영상으로 정확히 구현했다. 이뿐만 아니라 "꿀로 만들어진 키보드를 두드리는 영상을 만들어줘. 사람이 키보드를 누를 때 끈적이는 소리와 함께 꿀이 늘어났으면 좋겠어."라고도 요청하자 '꿀보드' 영상이 순식간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베오3를 활용한 영상은 단순한 시각 효과를 넘어 촉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AI ASMR'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다. ASMR은 '자율감각쾌감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줄임말로 속삭임, 바스락거림, 연필 사각거림 등 특정 소리를 통해 뇌를 자극하고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감각 반응을 의미한다. '꿀보드' 뿐만 아니라 초콜릿, 얼음, 화장품으로 만든 키보드 타건 영상부터 동물들이 직접 슬라임을 꾹꾹 누르는 영상까지 AI 기반의 ASMR 종류는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일부 영상 댓글에는 "영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프롬프트를 공유해달라"는 요청도 잇따랐다. 일상에서는 접할 수 없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구현되면서 참신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AI ASMR 콘텐츠를 즐겨 찾는다는 취업 준비생 김모(25)씨는 "예전 AI 영상들은 불쾌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는데, 요즘엔 상상도 못해본 조합으로 오감을 자극하니 창의적이고 힐링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셜네트워크시스템(SNS)에서 '#veo3'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은 7월 기준 약 28만 2천 건을 넘어섰다. "AI 기술을 막을 수 없다면 이런 힐링 영상만 평생 나왔으면 좋겠다"는 댓글에는 5만 개 이상의 '좋아요'가 달리기도 했다. 한편 AI 영상 콘텐츠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저작권 및 윤리 문제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창작자의 권리 보호나 진위 여부 판단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AI 생성 콘텐츠 표기 의무화' 법안을 촉구하는 청원글이 주기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는 해당 콘텐츠가 사람이 만든 것인지, AI가 만든 것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유튜브도 "실제 사람의 음성이 담긴 독창적인 콘텐츠만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며 오는 15일부터 AI 생성 콘텐츠의 수익 창출 자격 조건을 변경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최근 급증한 상업용 AI 콘텐츠에 대응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재미로 만들기 시작한 AI 영상이 각종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순천향대 정보보호학과 염흥열 교수는 "AI기술이 음성과 영상까지 만들어내고 있어 딥페이크 범죄 및 가짜 뉴스에 악용될 수 있다"며 "AI가 만들어낸 영상을 탐지하고 워터마킹(출처 표시)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규범 마련과 국제적인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